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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진

田成鎭

1885. 12. 29 ~ 196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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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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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瑞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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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도이리(桃李里, 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1919년 당시에도 대호지면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해 4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 및 정미면(貞美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대호지면과 정미면에서는 4월 4일 송재만(宋在萬)·이인정(李寅正)·남주원(南柱元) 등이 주도하여 면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월 말경 남주원·남상돈(南相敦)·이두하(李斗夏) 등 지방 유림들이 고종 국장을 참례하려 상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구해 귀향하여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하였다. 이후 만세를 외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3월 26일 면서기 김동운(金東雲)·강태훈(姜泰壎)·민재봉(閔載鳳)과 면소사 송재만 등이 대호지면사무소에서 회합을 갖고 김동운의 제안으로 다른 지방민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곳에서도 만세를 외치기로 합의하였다. 다음날 오후 4시경 면사무소에서 재차 모인 인사들은 김동운의 제안으로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위해 면민 각호 1명씩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하여 면내 마을 구장들에게 배포하고 면민들과 함께 정미면에 있는 천의시장(天宜市場)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4월 2일 강태훈이 결의 내용으로 공문을 기안 작성하고 송재만이 인쇄하였다. 강태훈은 인쇄한 공문에 면장의 직인을 찍었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을 다니며 구장에게 「도로보수병목정리(道路補修並木整理)의 건(件)」 공문서를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공문 내용을 알리고 참가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날 밤 송재만 등은 면사무소에서 도호의숙과 반곡서당의 훈장 한운석(韓雲錫)에게 애국가 작사를 의뢰하였다. 이들은 애국가 약 400장을 인쇄하는 한편 흰 광목으로 대형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4일 아침 대호지면사무소에 약 400명의 면민들이 운집하였다. 면장 이인정은 “여러분이 여기에 모인 것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함이다”, “조선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하자”는 연설을 한 후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면민들도 호응해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천의시장을 향해 행진을 시작하였다. 송재만 등은 애국가를 배포하며 군중을 이끌었다. 만세 행렬이 지나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만세 행렬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대략 3시간이 걸려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한 만세 군중은 대형 태극기를 세워 놓고 남주원·이대하·한운석·남상락·남상직 등의 연설을 들었다. 이어 시장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독립만세’를 소리들은 천의경찰관주재소 순사 우에하라(上原), 순사보 유기우(柳冀祐)·이재영(李在英) 등이 시장으로 출동해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1,000여 명의 만세 군중은 시장 일대와 주변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부 군중은 면사무소로 이동해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군중을 해산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한 일제 경찰들은 군중의 활동을 살피기만 하고 더 이상 제지를 하지 못하였다. 군중도 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각처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한편 천의에서 독립만세를 외친다는 급보를 접한 당진경찰서는 니노미아(二宮)·다카시마(高島) 순사를 출동시켰다. 이들은 오후 4시경 시장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어찌하여 우리 일을 막으려 하느냐? 결판을 내야겠다”며 순사들에게 저항하며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남태우(南泰祐)·김팔윤(金八允) 등이 니노미아·다카시마를 논 가운데로 떠밀어내자, 우에하라는 군중을 적극 제지하고 나섰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파견 순사 2명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여 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격노한 군중이 순사들을 향해 돌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순사 3명이 다급히 주재소로 도망쳤다. 군중도 순사들을 뒤쫓아 주재소로 가서 돌을 던지고 각종 시설과 기물들을 부쉈다. 주재소에서도 위협을 감지한 우에하라는 총기를 휴대하고 주재소를 나와 군중을 피해 도망쳤다. 남상직·이춘응(李春應)·고수식(高壽植)·권주상(權周相) 등 수십 명은 우에하라를 뒤쫓아 가서 붙잡고 구타하였다. 우에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인 다지리(田尻)가 군중과 옥신각신하는 틈을 타서 우에하라는 다시 시장 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시장 동쪽 도로에 있던 군중이 우에하라를 붙잡아 도랑에 내동댕이쳤다. 한편 송재만·이대하 등은 일본인 다지리를 구타하였다. 군중의 공격을 받던 다지리가 집으로 도망치자, 20~30명의 군중은 집까지 쫓아가서 구타하고 부인도 압박해 엽총 1정, 권총 1정, 탄약 등을 가지고 나왔다. 남태우·김팔윤·송봉숙(宋鳳淑)·김장안(金長安)·고울동(高蔚東) 등은 순사보 유익우·이재영을 구타하고 칼을 빼앗고 응징하였다. 그 사이에 날이 어두워지자, 군중은 다시 독립만세를 외치기를 기약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획득한 무기는 이대하의 집으로 모았다가 송재만이 적서리 숲 속에 숨겼다. 이어 송재만 등은 송전리의 민재봉 집으로 집합해 이후의 만세운동 추진을 협의하였다. 도이리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정미면 천의시장·천의경찰관주재소·정미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음주를 한 후 귀가하려고 천의리와 승산리 경계 지점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일본 순사 우에하라·니노미아·다카시마를 뒤쫓아 가는 군중을 보고 천의주재소를 향해 달려갔다. 시장과 주재소의 갈림길에서 직경 약 3촌 크기의 돌을 주워 주재소 남쪽 문을 향해 던져 시설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천의사장 북서쪽 도로 쪽인 우피건피장(牛皮乾皮場)에서 순사보 유기우가 군중에게 쫓기어 도주하는 것을 붙잡아 왼쪽 뺨을 때리는 등 일제 경찰을 응징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1919년 5월 12일 구류되었고,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기소되어 같은 해 9월 8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9월 10일 시위 주도 인사 39인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죄, 공문서 위조 행사 등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10월 24일 징역 1년을 받았다. 바로 항소하여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를 받았지만 징역 1년은 그대로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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