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전성순

田聖淳

1881. 4. 2 ~ 1950. 5. 6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전성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2) 1881년 4월 2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지곡리(池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전치선(田致先)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정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전개된 청양군 정산면(定山面)의 만세시위는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하였다. 이날 정산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사망하면서 만세시위는 4월 5일에서 6일까지 이틀간 목면으로까지 확대되어 전개되었다. 홍범섭 등은 4월 5일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이 열리자, 오후 3시경부터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군중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 헌병은 해산을 종용하면서 시위 주도자들을 연행하였다. 이 모습에 분노한 주민들이 대거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들은 권흥규의 지휘에 따라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이날의 시위는 해산되었으나, 다음날 권흥규의 시신을 운구하면서 더욱 큰 규모의 시위로 발전하였다.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권흥규의 친인척들은 4월 6일 아침, 순국한 권흥규의 시신을 헌병주재소로부터 인수하여 목면 안심리(安心里) 소재 고인의 자택으로 운구하였다. 운구행렬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과 많은 만장(輓丈)이 줄을 이었다. 이미 전날 만세시위의 소식을 접하고 운구가 지곡리를 경유할 때를 기다려 마을 주민들과 운구행렬에 참여하였다. 운구가 지나는 길목마다 주민들이 참여하여 운구행렬의 규모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운구행렬의 규모가 확대되자,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으로부터 받아두었던 ‘독립만세’라고 쓰인 종이 깃발 56장을 운구행렬 속에 배포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권영진 등과 함께 선창함으로써 운구행렬이 만세시위로 전환되는 과정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운구행렬은 ‘독립만세’의 깃발을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안심리를 향해 행진하였다. 권흥규의 운구행렬이 갑자기 만세시위로 전환되자, 일제는 공주 주재의 헌병까지 정산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운구행렬을 마주치자마자 즉각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와 권영진·김국삼(金國三) 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직후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청양헌병분견소에 구금되었고 운구행렬이 만세시위로 전환되는데 적극적으로 행동한 사실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