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만표
全萬杓1876. 1. 29 ~ 1959. 11.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영동군 학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6년 1월 29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아암리(餓岩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전명국(全明國)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3일 양봉식(梁鳳植)·이건양(李建陽) 등과 함께 학산면 서산리(鋤山里) 시장(호미실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는 영동군 학산면 주민들에게 뽕나무 묘목을 배부해 강제로 심게 하였고,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茂朱)를 남북으로 연결하기 위해 험준한 산악지대인 소백산맥(小白山脈)과 금강(錦江)을 가로지르는 도로공사에 주민을 동원하여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였다. 이로 인해 사망·부상 등의 위험이 커지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학산면 주민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학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양봉식은 을미사변 이후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1910년경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귀국한 양봉식은 민족대표인 정춘수(鄭春洙)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고,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 위해 귀향한 후 뜻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양봉식으로부터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듣고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동시에 양봉식이 학산면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이에 적극 찬성하였고, 이기영(李璣榮)·정해용(鄭海容)·전재득(全在得)·이건양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또한 이들과 논의해 호미실 장터의 장날인 4월 3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4월 3일 오후 4시경 양봉식, 이건양, 이기영, 전재득 등과 함께 호미실 장터로 나가자,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양봉식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하고 동참한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장터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양봉식 등과 함께 규모가 확대된 시위대를 지휘하여 서산리에 위치한 학산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도착한 시위대를 향해 양봉식이 값비싼 뽕나무 묘목을 강제 배부하고 심게 한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뽕나무의 처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양봉식의 발언에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시위대를 지휘해 면사무소 출입문을 파괴한 후 안으로 들어가 임시로 심어 놓은 뽕나무 묘목 약 28,000그루를 뽑아 상당수를 면사무소 내외에 뿌리고, 나머지는 모아서 소각하였다. 이후 기세가 오른 시위대를 이끌고 서산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때 양봉식, 이건양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솔선해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사무실, 숙직실의 집기와 비품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주재소 일제 경찰이 황급히 지원을 요청해 보병 50연대 소속 하사 이하 5명의 군인들이 학산면으로 출동하였고, 이후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10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일제 군경의 강력한 진압으로 22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와 함께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도피 생활을 전전하다가 결국 다음해 붙잡혔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6월 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