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찬
全景贊1898. 10. 1 ~ 1951. 10.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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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8년 10월 1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구성면(龜城面) 우부리(佑部里)에서 태어났다. 신탄상(薪炭商)으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1일 평북 구성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구성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최예락(崔禮洛)을 비롯한 구성군 방현면(方峴面)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었다. 그들은 1919년 3월 7일 남시(南市)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높이 걸고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무렵 “조선 민족이 독립의 소리를 발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떨치고 나가, “정의와 인도주의 관점에서 자유를 잃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1919년 3월 11일 남시에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4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시작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남시헌병주재소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미리 경계하고 있던 구성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시위대를 공격하고 주도자 15명을 체포하자, 어쩔 수 없이 시위대와 함께 해산하였다. 3월 31일 구성읍내 및 사기면(沙器面) 신시(新市), 방현면(方峴面) 남시 장터 등 3곳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날은 남시 장날로, 정오가 되자 시장을 중심으로 5,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남시헌병주재소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보병 77연대 병력과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면서 7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동료 11명과 함께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1심과 2심을 거쳐 “조선 민족으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항소하였다. 1919년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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