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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규

張弘奎

1880. 12. 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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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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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이원(利原)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이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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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7)

관련 사건

  • · 이원군(3.10
  • · 11)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7) 1880년 12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양문리(陽門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0일 이원군 서면(西面) 장터 시위와 3월 11일 이원군 동면 군선항(群仙港)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5일을 전후로 함경남도 이원군에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3월 7일 이원군 천도교 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은 동면에 위치한 천도교구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날 회의에는 이도재(李道在)·박승룡(朴承龍)을 비롯해서 이원군의 천도교 신자 15명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 박용해(朴龍海)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를 기초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과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긴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3월 8일 이도재는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 공시우(孔時祐)를 비롯한 15명의 이름을 기재한 선언서 500매를 인쇄하였다. 아울러 이도재·김병준·김선태(金璿泰)·박승룡 등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이원지단(利原支團)을 조직하고, 3월 10일에 장이 서는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9일 김병준·공시우·박승룡 등은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3월 10일 이원군 서면 남문리에 위치한 시장에 모일 것을 독려하였다. 3월 10일 11시 30분 무렵 이원군 서면의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군중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독립단 이원지단 소속 인사들이 군중에게 선언서를 나눠줬는데, 이때 천도교 교구장 김병준으로부터 선언서를 받고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서면의 남문리, 서문리(西門里)에 위치한 이원군청, 헌병분견소, 공립보통학교, 이원시장 등을 행진하였다. 이와 같은 시위대의 행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은 이도재 등 주도자 6명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11일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군선항에서 계속 이어졌다. 이때 군선항에 갔다가 100여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그날 시위에는 사립 진명학교 교사 김병홍(金秉洪), 용산리(龍山里)에 거주하는 이종렬(李鍾洌) 등이 시위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에 의해서 3월 10일 이원읍 장터 시위, 3월 11일 이원군 군선항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이원읍 장터 시위 및 군선항 시위에 참여한 인사들과 달리 별건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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