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해동
張海東1901. 8. 4 ~ 1927. 12.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1919년 대구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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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901년 8월 4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송라면(松羅面) 조사리(祖師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현 계성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3월 8일 대구부(大邱府) 서문(西門)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대구지역의 만세시위는 기독교 목사 이만집(李萬集)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이만집은 3월 2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교회 조사(助師) 김태련(金兌鍊)·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대하여 논의한 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장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만집과 김태련은 뜻을 함께 할 기독교인을 규합하였고, 김태련은 자택에서 독립선언서를 100여 장 등사하며 크고 작은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백남채(白南埰)·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 등은 교사와 학생 대표를 설득해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학생 대표가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자, 이 소식을 듣고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성학교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한편, 학생 대표들 간의 만남으로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도 만세시위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3월 8일 수업을 마치고 계성학교 교사·학생들과 함께 서문시장으로 이동하자, 신명여학교 학생 50여 명과 대구보통학교·성경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였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장터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이만집과 김태련이 쌀가마로 만든 단상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이 밀고 들어오며 제지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이만집은 사람들을 독려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한 학생·기독교인·장꾼·주민들까지 포함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서문시장을 벗어나 달성군청 앞까지 행진하였다. 그러자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시위대의 행진을 막았고, 일제 경찰도 총칼로 무장한 채 시위대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시위대와 함께 일제 군경에게 저항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제 군경이 폭력을 사용하며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주도자와 참여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150여 명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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