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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규

張逸奎

1900. 3. 14 ~ 1969.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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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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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高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고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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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홍천군 홍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1900년 3월 14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서빙고리(西氷庫里, 현재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본적지인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홍천면(洪川面) 신장대리(新場垈里)로 이주하였다. 이명으로 장수종(張洙宗)을 사용하였으며, 기독교 감리교인(監理敎人)이다. 1919년 당시 잡화상(雜貨商)을 운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홍천군에도 전파되었다. 홍천군 홍천면 신장대리 만세운동은 같은 마을에 사는 차봉철(車奉哲)이 고종의 장례식을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말경 차봉철은 연봉리(蓮峰里)의 기독교인 서상우(徐相祐)와 하오안리(下吳安里)의 천도교인 오창섭(吳昌燮)을 만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만세시위를 제의하였고, 두 사람이 동의하면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세 사람은 홍천면에 장이 서는 4월 1일에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각자 교인들을 규합하였다. 같은 홍천감리교회(洪川監理敎會)에 다니는 차봉철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동참하게 되었다. 주도자들과 함께 주민들을 만나 시위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시위 때 사용할 작은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3월 31일 주도자들과 함께 고익진(高翼振)의 집 앞 도로에서 만나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4월 1일 아침 일찍 만세시위가 열릴 장터로 향하였다.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는 장터에서 감리교측 주도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거사 당일은 홍천·인제(麟蹄) 간 도로공사로 인부들이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에 북방면 하화계리(下花溪里)·중화계리(中花溪里) 등지의 주민들은 인부로 가장하고 장터로 모이고 있었다. 오후 1시경 천도교인 오창섭과 김영옥(金永玉)이 큰 태극기를 들고 장터로 들어서자, 감리교 측 주도자들과 함께 약속대로 군중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주도자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 군중도 일제히 한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고 장터를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시위 열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군청과 면사무소에 가서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같은 날 오후 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일제는 헌병과 춘천수비대(春川守備隊)를 급파하여 시위대를 저지하였다. 수비대가 무력으로 군중을 막았지만, 주도자들과 같이 이를 뚫고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행진을 멈추지 않자 헌병들은 주도자 등을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이때 33명의 참여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다. 1919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이듬해인 1920년 4월 2일 만기 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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