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득
張寅得1888. 2. 21 ~ 1964. 9.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영동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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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5) 1888년 2월 21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영동면(永同面) 주곡리(主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장인덕(張仁德)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4일 영동군 영동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일어난 만세운동은 곧 충북 영동군에도 전파되었다. 영동군에서는 3월 하순경 면내 여러 곳에 종이로 만든 150여 장의 태극기가 배포되는 등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특히 영동장터의 장날이었던 3월 25일에는 시장 남쪽의 영동교(永同橋) 다리 위에 사방 약 1.3m 크기의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고양된 가운데, 주곡리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3월 1일 주곡리에서 주민들에 의해 고종 추모 행사가 진행되었다. 추모 행사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일어나고 있으며, 3월 25일에는 면 소재지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평소 시국에 대한 의견이 비슷하여 깊게 교류하고 있던 김태규(金泰圭)·한의교(韓義敎)·박성하(朴聖夏)·정성백(鄭聖白)·한광교(韓光敎)·정우문(鄭友文) 등과 논의하여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이들과 논의하여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영동장터 장날인 4월 4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 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4월 4일 김태규 등과 함께 영동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박명월(朴明月)이 운영하는 주막에 모였다. 참석자 전원의 옷차림은 장사꾼의 차림이었다.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만세시위에 대한 준비를 점검하고 각오를 다졌다. 오후 2시경, 동지들 각자가 장터의 곳곳으로 흩어져,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터의 주민들에게 배포하면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미 만세운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는 상황에서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이에 공감한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2,000여 명의 대규모가 되었다. 한의교 등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의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규모 만세시위의 발생 소식을 듣고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즉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일제 경찰에 대항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만세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발포하며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의교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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