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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익

張德翼

1888 ~ 1947.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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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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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晋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진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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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진주군 진주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晉州面) 비봉동(飛鳳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1세이므로 1888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18일 진주군 진주 읍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진주군의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된 계기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한 김재화(金在華) 등이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서 지역 인사들과 거사를 계획한 것이었다. 김재화는 3월 11일 진주로 돌아왔고, 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강상호(姜相鎬) 등과 거사를 모의하였는데,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하였다. 거사일은 읍내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하였다. 당일 군중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敎喩文)을 작성하여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본뜬 깃발을 세웠다. 이강우 등의 연설이 끝난 후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선창하였다. 시장에 모인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따라 불렀고, 순식간에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돌고, 읍내 중심가로 나아갔다. 만세시위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늘었고, 진주 읍내 중심가 전역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었다. 곧바로 일제 경찰들이 주도자 체포를 진행하여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잡혀갔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의 선두에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민족자결을 희망하고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친 것은 4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인의 본분으로서 독립을 바라는 소위로 1년의 징역을 처한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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