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한
張奎漢1874. 5. 2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개성 동면 대오족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74년 5월 21일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동면(東面) 대오족리(大烏足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개성군 동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밤 대오족리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동면 면사무소 부근의 오관산(五冠山)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는 횃불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9일 밤에도 고덕찬과 함께 약 50여 명의 대오족리 주민들을 지휘하여 다시 오관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만세시위를 지휘하였다. 산 위에 모인 주민들에게 “다른 동리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니, 우리 동리에서도 외쳐야한다”고 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날이 갈수록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대오족리의 주민들이 증가하였다. 3월 30일 밤에는 면사무소 앞의 오관산에 8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그동안의 만세시위에서 일제 경찰이나 헌병의 탄압이 없었기 때문에 사흘째인 이날의 만세시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민들의 사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고덕찬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횃불을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불을 피워 주변을 밝히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면사무소에 남아있던 사환을 통해 이미 퇴근한 면장 김세영(金世英)과 면서기 박한규(朴漢奎)를 소환하여 “면민 모두가 조선의 독립을 축복하고 있는데, 면의 대표자인 면장과 면서기는 왜 만세를 외치지 않는가”라고 추궁하였다. 그럼에도 면장과 면서기가 여전히 ‘조선독립만세’를 따라 외치지 않기에 면장과 면서기의 뺨을 때리는 등 구타하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압박하였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덕찬은 김세영과 박한규에게 “얻어맞는 것보다는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만세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면장 김세영과 면서기 박한규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면장 김세영에게 면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일장기를 꺼내 오도록 했다. 김세영이 가지고 온 2장의 일장기에 대해 “한국이 독립했으므로 일본 국기는 필요없다”고 하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날은 이와 같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해산 직후 송윤봉(宋允鳳)의 아버지 송종오(宋鍾五)와 함께 종이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다음날의 만세시위에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3월 31일 밤에도 고덕찬과 함께 대오족리 주민들을 이끌고 오관산으로 올라가 전날 제적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는 횃불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인근의 백전리(白田里)·탄동리(炭洞里)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상당한 규모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들을 지휘하여 다시 면사무소로 가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만세시위 발생 소식을 접하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하여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들에게 만세시위의 주도 인물도 파악되어 고덕찬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의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판결”이라고 이유를 밝히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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