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천
任喜天1875. 5. 2 ~ 1945. 7.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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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4) 1875년 5월 2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광생리(光生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희천(金喜天)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5일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와 4월 6일 청양군 목면(木面)에서 연달아 펼쳐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 서정리 정산시장에서 1919년 4월 5일 전개된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4월 6일 청양군 목면까지 이어졌다. 4월 5일 백곡리(白谷里)의 유림 홍범섭(洪梵燮)을 중심으로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은 오후 3시 경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배포하고, 시장에 나온 사람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정산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즉시 출동해 주도자 30여 명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하였고, 임희도(任喜道)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해 주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체포된 주도자들을 대신해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인 권흥규(權興圭)가 시위대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었다. 권흥규의 지휘를 받으며 7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하지만 가슴을 풀어 헤치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총격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4월 6일 아침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주재소로 갔다. 그리고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해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행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앞에 세운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목 마다 많은 주민들이 합류하였고, 운구행렬은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오후 5시경 목면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부터 태극기가 배포되고 독립만세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운구행렬은 시위대로 전환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정산의 헌병과 공주(公州) 등 인근 지역의 헌병까지 목면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파견된 일제 헌병들은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밤에 안심리로 도착한 운구행렬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일제 헌병에게 검거되어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고,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6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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