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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昌云

昌云

1884. 8. 1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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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昌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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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수안(遂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수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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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수안군 수안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1) 1884년 8월 15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도소면(道所面) 흥동리(興洞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천도교 중앙총부는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서 각 지역의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수안군에는 3월 1일 저녁 곡산군(谷山郡)의 이경섭(李景燮)이 천도교 중앙총부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달해주었다. 수안천도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해서 관내 천도교 인사들은 3월 2일 회합을 갖고, 3월 3일에 수안읍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런데 오후 3시경 수안헌병분대의 헌병들이 수안천도교구실을 급습하여 현장에 있던 천도교 인사들을 구금하였다. 일제 헌병의 연행을 피했던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은 계획대로 3월 3일에 천도교인을 규합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관내 천도교인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3월 3일 수안읍 일대에서 전개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거사 전날인 3월 2일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이시용(李時庸) 등과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일 오전 이시용과 함께 50여 명의 천도교인들을 인솔해서 수안읍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수안군 대천면(大千面) 사창리(社倉里) 길목에서 일제 헌병과 만났다. 일제 헌병은 보안법 제2조 위반을 거론하면서 시위대가 수안읍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하고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자 귀가를 결심한 일부 천도교인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수안천도교구장의 뜻을 따르겠다면서 일제 헌병의 해산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두천(李斗闡)과 함께 일제 헌병을 향해서 수안읍으로 향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던 일제 헌병을 밀고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일제 헌병은 수안읍 행진을 주도하였던 이두천을 붙잡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한편 3월 3일 수안읍에서는 새벽 6시, 11시, 1시를 전후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운동이 발생하였다. 천도교 인사들이 이끄는 시위대는 독립과 헌병분대의 퇴거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가서 헌병분대 경내로 진입하였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여 시위를 주도한 홍석정과 한청일이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총상을 입은 오관옥(吳觀玉)도 사망하였다. 일제는 수안읍에 병력을 증파해서 시위의 확산을 차단하는 한편, 시위에 참여한 인사를 색출하고 연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 관헌에게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 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저택침입죄 등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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