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昌秀
昌秀1898. 2. 20 ~ 1920. 3.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영산읍 결사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창녕군 영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98년 2월 20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계성면(桂城面) 명리(明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천도교인으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해 3월 13일 창녕군 영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창녕군 내 천도교도이자 최린(崔麟)의 제자로서 보성학교 출신인 구중회(具中會)는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과 함께 3월 13일에 영산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등사기를 이용해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만세시위에 사용할 목적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쓰여진 대형 깃발도 만들었다. 그들은 창녕군 내 지역민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3월 12일 밤 구중회의 집에서 회합이 있었다. 그 회합에는 구중회·김추은·장진수·남경명(南景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예정된 만세시위의 계획을 점검하였으며, 만세시위를 핵심적으로 주도할 23인의 결사단을 조직하였다. 영산면 만세시위를 이끌 23인 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결사단의 일원으로 3월 13일 오후 2시경 영산 앞의 남산봉에 갔다. 단원들과 함께 결사단원 맹세서에 서명하였다. 그 맹세서에는 “한국의 완전 독립주권국 쟁취를 선언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단원들은 개춘회(開春會)에 참석하기 위해서 남산봉으로 갔다고 말함으로써 일제 군경의 감시를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은 12일부터 결사단원을 감시하고 있었다. 창녕경찰서는 12일 구중회의 집에서 은밀하게 모임을 가졌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13일 남산봉에서 열린 결사단 회합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한 연행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일제 경찰의 체포 시도에도 불구하고 단원들과 함께 저항하였다. 그 과정에서 결사단원들과 함께 일제 경찰이 소지한 무기를 빼앗아서 인근 미나리 밭에 버리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경찰들을 미나리 강에 빠트리기도 하였다. 결사단과 일제 경찰들의 충돌이 있자, 그 소식을 접한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단원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현장에 집결한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창가(唱歌) 전진가(前進歌)를 부르면서 영산면 내에 진입하였다. 이때 보통학교 졸업자들이 이끄는 노동자들이 새롭게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를 포위하였으며, 시위대 일부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을 공격하였다. 구중회가 시위대를 상대로 연설을 한 후,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영산면 내의 시위 소식을 접한 창녕경찰서는 병력을 급파하였다. 새롭게 충원된 일제 경찰들은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구중회·김추은·장진수를 연행하였다. 그들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그날 오후 8시경 다른 결사대원들과 함께 남산에 모였다. 남산에서 결사대원과 함께 연행된 인사들을 구출시키자고 결의하였다. 결사단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영산읍내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창녕읍으로 향하는 도중에 계성교 인근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제 경찰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결사단원들과 시위대는 육박전을 전개하였지만, 일제 경찰의 무장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인근 산마루로 퇴각한 시위대는 투석전을 벌이면서 일제 경찰의 퇴각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충돌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군도에 의해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한편 결사단원들과 시위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창녕읍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남창교를 거쳐서 창녕읍으로 들어가려던 시위대는 일제 경찰의 저지를 받았으나, 북창교를 통과한 또 다른 시위대는 창녕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창녕읍에 도착한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창녕경찰서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연행된 인사들을 구출하려던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결사단원의 일원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검사 측의 항소로 같은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의 원심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만세시위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게 입은 상처와 체포 이후 일제 경찰의 의해서 자행된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졌다. 결국 부상과 고문의 여파로 출옥 후 4개월만인 1920년 3월 5일 향년 23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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