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贊逸
贊逸1895. 2. 27 ~ 1972. 10.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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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5년 2월 2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 고곡리(古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진(蔚珍)이고, 자는 국삼(國三), 호는 송원(松園)이다. 이명은 다른 한자의 임찬일(林燦逸)을 사용하였다. 보명(譜名)은 임상열(林尙烈)이다. 1914년 임하면 금소리에 설립된 금양의숙(錦陽義塾)에서 수학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1918년부터 손병희(孫秉熙)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신덕동(新德洞)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로 갔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서울에서 고종 장례식에 인산봉도단(因山奉悼團)으로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 10장을 휴대하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안동읍(安東邑)에 거주하는 김원진(金源鎭)을 만나서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임하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데 뜻을 함께 하였다. 이어서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손돌이(孫乭伊)·류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을 규합해서 길안면(吉安面)에서 장터가 열리는 3월 16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에게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할 것이라는 점을 전하면서, 한국인의 독립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길안면 장터 만세시위에 대한 호응이 적자, 3월 21일 금소동과 신덕동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 일대에 군중 3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는 신덕동으로 향하였다. 오후 9시경 신덕동에 도착한 시위대와 함께 경찰관주재소를 포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주재소에 있었던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에 참여한 임조일(林造逸)·임지열(林志烈)·신필원(辛必元)이 사망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일시적으로 해산하였지만,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흩어진 시위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11시경 금소동 조복선의 집 부근에서 5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를 향해서 신덕동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자고 외치면서 그들을 이끌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돌과 곤봉을 든 시위대를 이끌고 신덕 경찰관주재소로 진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찰관주재소의 유리창과 문이 파손되었으며, 경찰관주재소를 지키고 있었던 경찰들은 도망갔다. 이에 시위대는 신덕 경찰관주재소의 기물을 파손하고 호구 조사부를 비롯한 각종 문서를 파기하였다. 이후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를 향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공격해서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각종 문서도 없애 버렸다. 3월 22일 새벽부터 일제 군경은 금소동 전역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금소동 주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한편, 전날 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에 대한 색출 및 연행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지들과 함께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다. 1919년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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