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欣伊
欣伊1879. 1. 22 ~ 1940. 3.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의성군 안평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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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9년 1월 2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대사리(大司里)에서 태어났다.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전개된 안평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를 마친 김옥돈(金玉頓)·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 등의 교회 신도는 전국적으로 확산 중인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후 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참석한 인원에게 마을 주민인 이맹준(李孟俊)·이만준(李萬俊)·배세태(裵世泰)·정갑이(鄭甲伊)·이수원(李守元) 등과 함께 계획을 듣고 본격적으로 거사 준비에 참여하였다. 그날 오후 7시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6일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 행진을 벌인 후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7일 오후 8시 무렵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운집한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도중 합세한 250여 명의 주민을 이끌어 안평면(安平面) 마전동(馬轉洞)·도동(道洞)·괴산동(槐山洞)을 거쳐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창길동의 안평주재소에 도착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행진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지속한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8일 밤 300여 명의 군중이 전날의 시위대 체포에 격분하여 대사동 우리곡에 운집하였다. 시위대는 안평주재소 습격을 감행하였고, 일본인 순사부장과 한인 순사 및 군청 직원 등을 제압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전날과 같이 안평면 일대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9일 도리원(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대규모 시위대를 결집한 후, 의성경찰서를 공격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탈환하려는 한층 적극적인 항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시위대는 창길동을 출발하여 괴산동·도옥동(都玉洞)·신안동(新安洞) 등을 거쳐 봉양면(鳳陽面) 사부동(沙阜洞)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도리원 장터 시위에 합류하려는 1,000여 명의 군중을 시위대로 규합해 행동에 나섰다. 이들과 별도로 최초 운집한 4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시작했으나 300여 명이 합류하여 안평주재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고자 안평면 일대를 거쳐 거사 장소인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행진하고자 하였다. 이들 두 시위 집단은 도리원장터 행진 도중 합세하면서 시위 행렬은 수천 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시위 행렬이 흰재마루에 이르렀을 때 시위운동 첩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는 한국인 경부 1명, 순사 2명, 헌병 상등병 등 무장 요원을 도리원 주재소로 급파하였다. 더불어 일제 경찰은 대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80연대에 지원을 요청한 후, 삼엄한 경계 태세를 펼쳤다. 일제 군경은 시장을 폐쇄한 후, 삼엄한 경계 태세를 펼쳐 시위대의 행진을 봉쇄한 후,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천 명의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와 돌로 무장한 채 도리원주재소로 진격하여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에 일제 군경은 무차별 총격으로 대응하여 현장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시위대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해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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