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洪基
洪基1899. 9. 5 ~ 1957. 3.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양성면(4.1)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9월 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양성공립보통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안성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4월 1일 오후 이유석·홍창섭 등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같은 마을의 이규완(李圭完)·이태영(李泰榮)·이상옥(李相玉)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참여를 결의하였다. 이날 밤 외가천리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 앞에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이 면사무소 안에 있는 것을 파악한 주도자들은 남길우 등을 밖으로 끌어내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만세시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만세시위의 열기에 고무된 이유석 등은 양성 지역으로 확대시키려고 ‘양성으로 가자’고 외쳤다. 대열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이날 밤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오후 9시 경 양성 경찰주재소 앞에 수백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여 일제 경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성은고개에서 내려오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목격하고, 곧바로 합류하였다. 두 지역의 주민들이 연합하면서 시위대는 약 2,0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연합한 시위대와 함께 일제의 양성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공격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최은식·이상옥·이규완·한응교(韓應敎)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의자 등 주재소의 집기들을 불 속에 던져 태워버렸다. 다음으로 양성우편소에서도 시위대의 선두에서 돌을 던지고, 안으로 쳐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고, 옷가지 등을 가지고 나와 모두 소각시켰다. 이후 평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 상점으로 행진하는 등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새벽 4시 경 다른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으로 귀환하여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원곡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의 마지막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만세시위에 대해 보고받은 일제 당국은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과 함께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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