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亨垣
亨垣1899. 10. 27 ~ 1969. 11.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서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99년 10월 27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청해면(靑海面) 덕음리(德音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에 재학 중으로 서울 경운동(慶雲洞)에서 하숙하였다. 종교는 기독교로 서울 중앙교회에 다녔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과 5일 남대문역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점심시간에 동급생 길영의(吉暎義)에게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일 날 점심 식사 후 고종황제 국상을 참관하기 위해 서울에 온 조부 이태홍(李駄洪)과 함께 탑골공원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마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를 하숙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 3,000~4,000명과 일반 민중으로 이루어진 시위대는 공원에서 출발하여 시내 주요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종로, 남대문, 대한문, 미국 영사관, 프랑스 영사관 등을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오후 5시에 황금정(黃金町)에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였다. 3월 5일 학생 주도로 남대문역 앞에서 만세운동이 9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시 40분경 집을 나와 남대문으로 가는 도중 태평정(大平町)에서 시위대와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행진하였다. 이후 대한문(大漢門) 앞을 지나 신교(新橋)를 건너 종로 네거리에 도착했을 때 일제 경찰의 진압이 있었다. 이에 견지동통(堅志洞通) 북쪽으로 도망쳐 안국동(安國洞)을 지나 귀가하였다. 이후 3월 8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서면(蘆西面) 서수라(西水羅)에 공의(公醫)로 파견되어 4년간 근무하였다. 이후 1927년 7월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新昌面)에 공의로 부임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의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는 북청군 신창면협의회 의원과 함경남도 도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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