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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鉉祐

鉉祐

1894. 1. 9 ~ 1925.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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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鉉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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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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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영덕 창수면(3.19)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4년 1월 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인량동(仁良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창수면 창수동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영덕군의 만세운동은 김세영(金世榮)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 지역 유지 등이 계획하여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시장과 영덕면 및 병곡면 등 영덕 내 각 지방에서 일어났다. 창수면에도 영해면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져서 영양군(英陽郡) 출신의 이종구를 비롯하여 삼계동(三溪洞)과 오촌동(梧村洞)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영해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다음날인 3월 19일 길을 나서게 되었다. 영해면으로 가던 도중에 이종구 일행은 신기동(新基洞)에서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과 신기동 주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시간상 영해면으로 가는 것은 늦었다고 판단하고 영해면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창수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당시 신기동에는 도로공사로 전답을 강제수용 당한 주민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종구를 위시한 일행이 와서 시위 참여를 권유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당시 이수각(李壽珏)·권재형(權在衡)·이현설(李鉉卨) 등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에 뜻을 같이하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창수동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시위대의 규모는 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주도 인물의 권유에 따라 의기투합하여 참여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창수동에 진입하게 될 무렵에는 400여 명 이상의 인원이 되었다. 3월 19일 오후 4시 경 창수주재소에 만세시위대가 당도하였다. 당시 창수주재소에는 이미 전날 영해면을 비롯한 영덕군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 주재소 등 여러 관공서가 파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들이 창수면에서의 시위에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400명이 넘는 대규모의 군중이 손에 태극기와 무기를 들고 공격을 감행하자, 주재소를 지키고 있던 일제 경찰들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이끌고 창수주재소를 공격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권재형·박치운(朴致雲)·이현석(李鉉奭)·이영호(李永浩)·박재복(朴載馥)·김용이 등과 함께 시위 군중의 최전방에서 큰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운동을 고양시켰다. 또한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여 각종 기물을 파괴하고 주재소 건물을 부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공격을 받은 창수주재소는 파괴되었고, 청사에 딸린 유치장의 기둥과 기타 서류, 기구 도 모두 파괴되었다. 오후 7시 경 창수면 만세시위 군중은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하고 현장에서 철수하였다. 중심 역할을 했던 인물들과 함께 당시 자진 해산하였다가 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에 의하여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에서 이른바 소요, 건조물 손괴, 가택 침입, 공문서 훼기, 각 기물 손괴 및 만세시위로 인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항소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과 같은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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