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漢基
漢基1891. 7. 14 ~ 1966. 10.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 원곡면
- · 양성면(陽城面)(4.1)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7월 14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현 안성시)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경(慶)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안성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는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1일 오후 친족이었던 이유석(李裕奭)으로부터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계획을 전달받고, 한국의 독립이라는 취지에 크게 공감하여 이병문(李丙文)·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였다. 이날 저녁 외가천리(外伽川里)에 외치한 면사무소 앞에 1,000여 명의 원곡면 주민들이 집결했다. 이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열정적으로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했던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유석·홍창섭(洪昌燮) 등 주도자들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일제의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으로 가서 그곳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대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양성면과 경계를 이루는 성은고개 정상에 만세시위대가 도착하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했다. 이 집회는 만세시위 분위기를 재정비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성토하고, 이후 양성의 만세시위 방향을 만세시위대 전체가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유석·홍창섭 등은 “한국은 이미 독립했다. 이제 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시설은 필요 없다, 지금부터 양성으로 가서 주재소 및 우편소, 그 외 일본인의 집을 불태우자”는 내용으로 연설하여 주민들을 격동시켰다. 주도자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하여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주워 들고,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날 밤 양성면의 주민들도 오후 9시 경부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은 동항리(東恒里)에 위치한 경찰주재소 앞에서 일제 경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해산하려던 시점에 양성면의 주민들은 성은고개에서 횃불을 밝히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 방향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를 목격하였다. 이에 양성면 주민들은 해산을 중단하고, 곧바로 원곡면의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양성면 주민들을 만나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며 더욱 열정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는 이유석·홍창섭·최은식(崔殷植)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일제 경찰의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남현서(南玄西)·이유만(李裕萬) 등은 주재소 건물에 불을 피워 건물을 소실시켰다. 다음 목표인 양성우편소로 행진하여 돌을 던져 우편소 유리창을 깨뜨렸다. 우편소에서도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우편소를 공격하였고, 양성면 면사무소로 행진하는 만세시위대에 합류해 면사무소 공격에 참여하였다. 일부 시위대는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도자토 토요테(外里與手)와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 집을 공격하여 기물과 가구 등을 불태웠다. 양성면의 곳곳에서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원곡면으로 귀환하여 원곡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새벽 4시경 해산하였다. 4월 3일 일제는 원곡면과 양성면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해 경찰이 아닌 일본군 제79연대 소속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돼 조사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이른바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만세운동은 소요죄(騷擾罪)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만세시위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건조물 소훼(燒燬)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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