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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學寧

學寧

186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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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學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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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성천(成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성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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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성천읍 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8)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통선면(通仙面) 용담리(龍潭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52세로, 1868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성천군 읍내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만세 운동은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기획되었다. 2월 말 평양에서 천도교 대교구장회의가 열렸는데, 이 때 천도교 성천교구장(成川敎區長)이었던 이돈하(李燉夏)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만세운동에 한 소식을 접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2월 28일 밤 이돈하는 기차로 급하게 성천군으로 돌아와, 3월 4일에 성천군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이대수(李大秀)·박치상(朴緻祥)·석이원(石履元) 등을 성천군 내 각 지역에 파견하여 천도교도들을 규합하게 했다. 그 결과 3월 4일 아침 10시, 성천군 읍내에 천도교도 수백 명이 계획대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평양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주변에 배부하는 한편,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곧바로 호응하였으며, 금새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평소 일제의 강제병합 이래 독립을 꿈꿔 오던 중 기뻐하며 시위에 참석하였다. 시위대는 곧 읍내에 위치한 헌병분대를 지나치게 되었다. 석달억(石達億), 윤정섭(尹貞燮) 등과 함께 앞장 서서 식민 통치 기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헌병분대를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헌병분대의 유리창과 집기를 부셨으며, 자리에 있던 헌병분대장을 구타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겨냥하여 발포하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시위대는 일제 헌병의 총탄에 의해 6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일제 헌병들은 이어 검거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에서 헌병분대 습격을 주도한 혐의로 인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징역 2년을 받았다. 상고하였으나 9월 18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소요를 일으킨 것이 인정되고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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