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學述
學述1897. 8. 22 ~ 1970. 12.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3.19)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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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7년 8월 22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창수동(蒼水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나이는 22세였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창수동에서 마을 구장(區長)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수각(李壽珏)의 아들이다. 1919년 3월 19일 영덕군 창수면에서도 만세운동이 발생했다. 이는 전날인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시장 및 영덕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창수면 신기동(新基洞) 구장인 이현설(李鉉卨)은 영해면에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참가하기 위하여 길을 나서던 오촌동(梧村洞) 및 삼계동(三溪洞) 주민들과 협의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시위가 소강상태일 것으로 생각되자 영해면으로 가는 대신 창수면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창수동 마을 구장인 이수각을 비롯하여 권재형(權在衡)·이현우(李鉉祐) 등 시위대를 이끌던 인물들도 이에 동의하면서 시위대 일행은 창수면 주재소를 목적지로 정하였다. 당시 신기동에는 도로공사로 인하여 토지를 강제수용 당한 농민들이 많아 일제의 정책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만세운동이 결의되자 주민들이 속속 결집하여 150명 이상의 시위대가 만들어졌다. 당시 아버지 이수각의 권유를 받아 시위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김금석(金錦石)을 보내 창수면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이에 동네를 집집마다 다니며 매호당 1명씩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수각·권재형·이현우·이현설 등과 더불어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오후 4시 경에는 창수주재소로 향하여 무기를 든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당시 주재소에는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찰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4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경찰의 해산 요구에 응하지 않고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주재소 및 부속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공문서 등을 훼손하였다. 3월 19일 오후 7시 경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접수하고 자진해산을 하였다. 이때 해산하였다가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 손괴, 가택 침입, 공문서 훼기, 각 기물 손괴와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항소한 결과,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1심과 같은 징역 1년 6월을 판결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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