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羲弼
羲弼1880. 12. 25 ~ 1968. 1.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2)
관련 사건
- · 안동군 예안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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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2) 1880년 12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분천동(汾川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이명은 이의필(李義弼)이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은 안동군에서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만세시위인 동시에 1919년 3월 13일 이상동(李相東)의 1인 만세시위 이후 두 번째로 일어난 것이었다. 모두 세 계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끈 주도자는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었다. 여기에 예안면 유림들과 기독교도들도 3월 17일 예안면 장터에서 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예안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선성산(宣城山) 쪽에서 우레와 같은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들렸다. 선성산에서 30여 명의 군중이 일제가 세운 비석을 쓰러뜨리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만세 소리와 동시에 장터 주변에서도 1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뛰어나왔다. 이들의 만세 소리에 장터에 있던 주민들과 함께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불렀고, 시위에 동참하였다. 시위대의 규모는 1,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장터를 넘어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동봉(李東鳳)이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었고, 이때 만세를 외치며 뒤따랐다. 그러나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 경찰이 수비대를 파견하면서 주도자 등 15명을 체포되자 만세시위는 잠시 중단되었다. 장터에 흩어져 있던 군중과 함께 다시 모여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오후 6시경 ‘구속자 석방’을 외치면서 시위대와 함께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고, 가로막는 주재소 수비병을 제치고 투석전을 벌이며 들어가 구속자 탈환을 시도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과 수비대는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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