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志樂
張志1905. 3. 10 ~ 193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공산주의청년단
- · 조선혁명청년연맹
- · 한국공산주의자(K.K.) 중국공산당 북평시위원회
- · 중국공산당 석가장공작위원회
- · 항일군정대학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광저우봉기
- · 하이루펑소비에트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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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5) 1905년 3월 10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북중면 하장동(河張洞)의 자작농 가정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장지락(張志洛)·장북성(張北星)·장지학(張志鶴)·장명(張明)·유청화(劉淸華)·유금명(劉錦明)·유한산(劉寒山)·유한평(劉漢平)·한국유(韓國劉)·유자재(柳子才)·이철암(李鐵庵)·우치화(于致和) 등을 사용하였고, 필명은 북성(北星)·염광(炎光)·황야(荒野)이다. 김산(金山)은 1941년 님 웨일스(Nym Wales)와 공동으로 『아리랑』을 집필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필명이다. 1912년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다 1916년 둘째 형의 도움으로 평양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때 평양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혀 3일간 구금당하였다. 그해 여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가 가을에 다시 귀국하였다. 구둣방 운영으로 돈을 번 둘째 형의 도움으로 소련 유학을 위해 단둥(安東)을 거쳐 하얼빈까지 갔다. 그러나 시베리아내전으로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 운행이 중단되어 유학을 포기하고, 1920년 3월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3개월 동안 배웠다. 1920년 겨울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신문』의 교정과 식자 작업을 하는 한편, 야간에는 인성(仁成)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때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의 지도자를 만났다. 1921년 10월 안창호의 소개로 톈진(天津)의 난카이대학(南開大學)에 입학하였으나, 곧 자퇴하고 베이징(北京)의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에 머물렀다. 1922년 귀향하였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가 셰허의과대학(協和醫科大學)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다시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단원들과 교류하였다. 1923년 겨울 공산주의청년단에 참여하였다. 1924년 김규광(金奎光, 일명 金星淑·金忠昌)·양명(梁明)·김원봉(金元鳳) 등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창일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베이징지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25년 1월 베이징에서 김규광·양명 등과 함께 조선혁명의 이론을 정립하고 통일전선을 강조한 『혁명』을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하였다. 편집을 맡아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리다자오(李大釗)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중국공산청년동맹의 창시자 스춘퉁(施存統)·취추바이(瞿秋白) 등을 만났다. 1925년 가을 광저우(廣州) 쑨얏센대학(中山大學) 법학원 정치학부 2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중국공산당 조선인 소조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과 이를 잔인하게 진압한 열강에 항의하는 반외세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5·30운동). 광저우에서는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열강에 기대고 있는 군벌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혁명 열기에 동참하려는 한국인이 속속 광저우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아리랑』에서 당시 분위기를, “좌익이건 우익이건 모든 한국인이 중국에서 일어난 이 새로운 물결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조국해방의 첫걸음이라 생각하고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모든 종류의 한국인 혁명가들이 자진하여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앞장서서 광저우에 달려갔다”고 회상하였다. 1926년 늦봄, 광저우에서 조선혁명청년연맹 결성에 참가하여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기관지 『혁명행동』의 부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때 당시 중국혁명을 자문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광저우에 와 있던 보로딘(Mikhail Markovich Borodin) 등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분파가 활동하고 있던 조선혁명청년연맹이란 공개 조직에 ‘한국 공산주의자’라는 의미의 ‘K.K.’란 비밀 그룹을 만들었다. 1926년 7월 중국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북벌을 선언하고 중국통일에 반대하는 군벌들과 전쟁하며 베이징을 향해 나아가는 국민혁명을 시작하였다. 많은 조선인과 함께 ‘화북으로! 그리고 한국으로!’를 꿈꾸며 북벌에 참가하였다. 1927년 4월 조선혁명청년연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7년 4월 15일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광저우에서 무장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을 와해시키고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공격하였다. 이에 12월 10일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장타이레이(張太雷)가 이끄는 봉기에 200여 명의 조선인 동지들과 함께 참가하였다(광주봉기). 11일에 수립된 광저우소비에트정부에서 ‘노동자 농민 무장부’에 배치되어 무기 배급을 책임졌다. 그러나 12일에도 봉기군은 광저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고, 봉기는 실패하였다. 살아남은 참가자들은 12월 16일 광둥성 하이펑현(海豊縣)과 루펑현(陸豊縣)에 있는 하이루펑 근거지에 도착하였다. 1928년 1월 21일 중국공산당 동강(東江)특별위원회 산하에 당학교가 세워졌을 때 장북성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교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3일 중국국민당 군대의 공격으로 근거지를 지키지 못하고 부대가 해체되었다. 이후 비밀 연락원의 도움을 받으며 홍콩을 거처 상하이에 도착하여 동인(同仁)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0월 프랑스조계지에서 김규광·오성륜(吳成倫)을 만나 앞으로의 진로를 토의하며 몸을 추슬렀다. 1929년 초봄,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중국공산당 베이핑(北平)시위원회 대표가 되었으며, 유금한이란 가명을 사용하였다. 3월 6일 허베이성(河北省) 고등법원 제1분원에 이해명(李海鳴)의 박용만(朴容萬) 살해 사건에 대한 한국독립당 북평촉성회의 대표 자격으로 출두하여 “1924년 전 박용만은 독립당이었지만 그 후에는 당을 팔았다”고 증언하였다. 4월 1일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무신론(無神論)』을 번역·출판하였다. 그해 4월 중국공산당의 파견으로 펑톈(奉天)에 가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대표를 만나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연계 문제를 토의하였다. 당시 국제공산당은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 사회주의자에게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라는 ‘1국 1당 원칙’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지 않고 한국혁명을 위해 활동하려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하지만 만주의 많은 한인 운동가들은 이때까지도 중국공산당에 참여하고 그들의 지도를 받는 것보다 독자적 체제를 유지하며 연대하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4월 20일 지린성 지린에서 열린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여 광저우봉기 때 알게 된 정공목(丁公木) 등을 만났다. 이 대회에서는 한국인이 “만주에서 일제에 대한 투쟁만을 하고 중국인 지배계급이나 지주에 대한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정하였다. 8월 재만조선농민동맹 제3회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때 경험을 『아리랑』에서는 “비록 내가 아직도 극동에서의 지도적인 혁명과제가 중국문제라 생각하고, 거기에 몰두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 대한 믿음이 무한히 되살아나고, 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우리 조국의 앞날에 희망을 갖게”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1월 6일 북경살인사건이 근거 없는 중상적 거짓말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해 초겨울, 단둥에 가서 한 달가량 머물며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연계문제를 협의하고, 군수 공장에 비밀세포도 조직하였다. 1930년 초 단둥을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핑(北平)시위원회 산하의 고당지부 서기를 담당한 제숙영(齊叔榮)과 사랑에 빠졌다. 3월 8일 소설 「기묘한 무기」를 집필하여 『신동방(新東方)』 제1권 제4기에 발표하였다. 3월 18일 1926년 돤치루이(段琪瑞) 북양(北洋)군벌이 천안문광장의 학생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3·18참안을 기념하는 학생시위 행진을 조직하였다. 6월 당원 훈련반을 조직하여 유자재라는 가명으로 강의하였다. 6월 27일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한해(韓海)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해 동지를 조문하여」라는 장편 시를 썼다. 11월 20일 유청화라는 가명으로 광저우봉기 3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준비회의에 참석하고자 도착한 시청취(西城區)의 공과대학 부근에서 국민당 경찰에 붙잡혔다. 12월 5일 베이핑공안국에서 심문을 받는 도중 작성한 자술서에 “지금 우리 조선은 일본의 극단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조선민족의 출로는 오직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완전 독립을 이룩하는 것뿐이다. 현재 조선혁명운동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 즉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적 노농해방운동이다. 1928년 이후 상술한 두 가지 경향이 서로 합작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혁명의 커다란 손실이다. (중략) 나의 의견은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다.”라고 작성하였다. 1931년 1월 7일 톈진의 일본총영사관에 인도되었다. 1월 14일 “오늘부터 앞으로 3년간 장지락이 중국에 머무르는 것을 금지한다”는 일본 총영사의 명령서를 받은 직후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40여 일 동안 조사받았지만 끝내 자백을 거부하였으므로 증거 부족으로 가석방되어 고향에 가서 두 달 동안 요양하였다. 이때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성애의 의미와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해 4월 베이징에 돌아왔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된 것을 의심한 당조직에서 관계를 회복해 주지 않았다. 그 사이 ‘왜놈’의 첩자라는 협의를 받자 당의 ‘사정회’에서 결백을 주장하여 인정받았지만 당원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베이핑시 공안국에서 계속 찾고 있었으므로 숨어다니다가 1932년 초 허베이성 제2사범학교에 가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3월 7일 베이핑시공안국 경찰이 학교로 찾아오자, 교장과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며 가오양현(高陽縣) 북신장(北辛莊)으로 피신하여 그곳의 사범반에서 역사·정치·철학을 가르쳤다. 6월 20일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 레닌의 인생관』이란 번역서의 서문을 썼다. 7월 하순 당원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공산당 허베이성위원회가 무장봉기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자 적당한 전술이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8월 20일 무장봉기에 참가하였다. 폭동이 실패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9월 23일 황야라는 필명으로 「일본 정치적인 봉건주의」, 「독일 총통의 권력」이라는 글을 『국제역보(國際譯報)』 제4기에 게재하였다. 그해 말, 우치화라는 가명으로 경산(景山) 동가(東街) 3안정(三眼井) 26번지에 살면서 새로운 여자 친구인 조아평(趙亞平)을 만났다. 1933년 5월 1일 이철암이란 가명으로 조아평과 함께 시청취 서철장(西鐵匠) 호동 15번지 거처에서 국민당 경찰에 붙잡혔다. 5월 7일 변절자 장문훈(張文勳)이 ‘공산당 내의 트로츠키파’라고 고발함에 따라 할 수 없이 1925년 광저우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국민당에 입당하여 광둥대학 국민당 구분부(區分部)에서 간사로 근무하였다고도 주장하였다. 국민정부의 비밀경찰조직인 남의사(藍衣社)의 전향 공작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철함이 유청화라고 판단한 베이핑시 공안국은 6월 6일 톈진의 일본총영사관으로 압송하였다. 7월 30일 잉커우(營口)·펑톈(奉天)을 거쳐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3년간 중국에 갈 수 없다는 명령서를 위반한 것을 제외하면 처벌할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석방되었다. 병원에서 한달 가량 진료를 받았으며, 3년이 되는 1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1934년 1월 베이징에 돌아왔다. 허베이성 북서부의 장자커우(張家口)에 가 있는 조아평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조아평은 베이징에 돌아왔고, 두 사람은 아주 곤란한 환경에서 부부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치경제지리』·『제3차 문화위기』 등의 저서를 집필하거나 번역일을 하였다. 1935년 여름, 유한평이란 가명으로 스좌장(石家莊)에 가 월급 40원을 받으며 『상보신문(商報新聞)』을 편집하는 한편, 일본어 훈련반을 꾸려 일본어 교육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였다. 9월과 10월에는 철도노동조합에서 노동자교육을 실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 스좌장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은 당에 복당하려고 해도 보증해 줄 사람이 없어 상하이로 갈 수밖에 없었다. 1935년 말, 상하이에 가서 김규광·박건웅(朴建雄)을 만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결성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글」(8·1선언)을 발표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공식화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 논의하였다. 1936년 4월 난징(南京)에 가서 나청(羅靑)의 집에 묵으며 당원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중국공산당과의 조직적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난징에는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중심으로 관내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여러 운동가를 만났다. 여름에 잠시 상하이에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5년 8월 1일 난징을 떠나 장명이란 가명으로 톈진에 있던 중국공산당 북방국(北方局)의 소개장을 갖고 산시성(陝西省) 북부의 바오안(保安)에 도착하였다. 12월에는 와야오바오(瓦窑堡)에 있는 항일홍군대학에서 일본경제를 강의하였다. 1937년 1월 옌안(延安)으로 가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화학·수학·일본어·한국어를 강의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난징에서 옌안까지 갔던 것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는 옌안에 가야 당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복당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끝내는 운동에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4월 12~19일 엔안에서 열린 서북청년구국회 제1차 대표대회에 출석하여 연설하였다. 4월 20일 부인 조아평이 고향인 허베이성 안궈현(安國縣)에서 아들 고영광(高永光)이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 1937년 6월 18일 님 웨일즈와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인터뷰는 2개월 동안 17차례 계속되었다. 님 웨일즈는 자신의 취재 일지에 “연안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불행한 사람”이라 적어 놓았다. 1938년 1월 강청(康生)은 『해방』이란 잡지 제29·30기에 「일본침략자의 함정이며 민족의 적인 트로츠키 비적을 제거하자」는 글을 발표하였다. 8월 18일 산간닝(陝甘寧) 변구(邊區)의 보안처는 “일본침략자의 간첩이므로 제 고향에 보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10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보부와 사회부장인 장칭(江靑)이 보안처 보고에 “일본침략기관의 정보 인원대로 처리하라. 위원의 결정에 의해 비밀로 사형하라”고 지시하고 서명하였다. 10월 트로츠키파이자 친일간첩 혐의로 비밀리에 처형당하였다.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는 후야오방(胡耀邦)의 지시에 따라 많은 조사를 벌여 「장명 동지에 관한 정정 결론」에서 트로츠키파에 가담한 문제는 심사 당시에도 인정하지 않았기에 지금 부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일본 간첩혐의에 대해서도 “당 조직을 손해하는 행위가 없었기에 지금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장명 동지)는 오랫동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는바, 이제는 마땅히 누명을 벗겨 주어 명예를 회복하고 당적도 회복하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결론은 제숙영이 사업하던 기관에 전달되었고, 1925년 중국공산당의 당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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