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호
鄭光好1895. 8. 2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청년독립단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화동한국학생연합회
- · 상해대한교민단
- · 신한청년당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2.8독립선언
- · 1919년 만세운동
- · 극동피압박민족대회
- · 극동혁명청년대회
- · 국민대표회의
- · 유호청년임시대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5년 8월 22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전남 광주군 광주면 사동(社洞)이다. 1919년 1월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유학 중 최팔용(崔八容) 등과 2·8독립선언을 계획하고 2월 2일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김범수(金範洙)·최일구(崔一求) 등을 만나 도쿄 유학생의 독립 선언에 국내 청년들의 호응을 논의하고, 독립선언서를 널리 배포하기로 하였다. 2월 4일 김범수·최일구 등과 함께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 있는 최일구의 처가인 김기형(金基亨)의 집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다량 인쇄하였다. 3월 인쇄한 선언서를 광주로 옮기고, 최한영(崔漢泳)·김강(金剛) 등과 함께 광주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거사일을 3월 10일 장날로 정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서 1,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면서 광주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일로 같은 해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서울로 피신한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 2월 13일부터 이듬해 2월 14일까지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 근무하며 나라 안팎의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 사업을 선전하고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와 통신·연락을 담당하였다.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전라도의원에 선임되었으나 4월 6일 곧바로 사면을 청원하여 물러난 뒤 청년운동에 적극 나섰다. 1921년 9월 1일 중국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이 독립을 위해 서로 연락을 취하고 활동할 것을 목적으로 화동한국학생연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열리는 워싱턴 군축 회의에 맞서 소련의 이르쿠츠크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1921년 10월 23일 김상덕(金相德)과 함께 화동한국학생연합회 대표 자격으로 파견되어 만저우리(滿洲里)를 거쳐 개최 예정지였던 이르쿠츠크에 11월 3일 도착하였다. 대회 개최지가 모스크바로 변경되면서 다시 모스크바로 자리를 옮긴 뒤 1922년 1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어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3일 동안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김상덕과 함께 화동한국학생연합회 대표로 참여한 뒤 3월경 상하이로 돌아왔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의 내분과 외교 활동의 실패로 그 대표성과 위상이 크게 위축되면서 독립운동계를 새롭게 통일 강화할 방안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1922년 6월 8일 유호청년임시대회(留滬靑年臨時大會) 집행위원이 되어 12일, 19일, 24일, 그리고 7월까지 4차례의 시국비판연설회를 개최하여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촉구하였다. 1923년 1월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전라도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참가한 대표들의 자격을 심사하는 5명의 자격 심사 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는 동안에는 박응칠(朴應七)·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과거문제조사위원회 분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 그리고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로 분열되었다. 6월 3일 창조파가 자신들만으로 국민대표회의를 열고 국호를 한, 연호를 건국 기원으로 정하자 이날 개조파 57인은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김철(金澈)과 함께 전라도 대표로 서명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1924년 1월 상해대한교민단 이사회에서 학부위원에 선임되어 상하이 교민 지원과 자녀 교육에 노력하였다. 1924년 6월 12일부터 12월 25일까지 약 6개월 동안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검사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2월 21일 열린 신한청년당 총회에서는 여운형·김철·박진(朴震)·서병호(徐秉浩)·한진교(韓鎭敎)와 함께 이사에 선정되어 사실상 소멸 상태에 있던 신한청년당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1926년 7월 8일 안창호 등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임시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한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가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상하이 정국이 불안해지자 5월 19일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실업계에 종사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광주부윤과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