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貞浩
貞浩1913. 3. 1 ~ 1990. 7.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독립당
- · 광저우한국유학생회
- · 조선민족혁명당
- · 조선의용대
- · 한국광복군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13년 3월 1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봉덕동(鳳德洞)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이두산(李斗山)의 아들이다. 1925년 부친 이두산을 따라 상하이(上海)로 건너갔고, 1928년 1월 부친을 따라 푸젠성(福建省) 샤먼(厦門)으로 이주하였다. 1930년 샤먼대학 교육학원에 입학하였고, 1931년 광저우(廣州)의 중산대학(中山大學) 문학원 영문학과로 전학하였다. 이 무렵 부친과 함께 한국독립당 광둥(廣東) 지부 기관지인 『한성(韓聲)』의 편집·제작에 참여하였다. 창간호부터 제3호에 걸쳐 석천(石川)이라는 필명으로 「일본 제국주의하의 한국 현상(日本帝國主義下之韓國現狀)」을 연재하였다. 1934년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1935년부터는 한국 유학생을 관리하는 조교로 근무하였다. 1935년 6월 광저우한국유학생회(廣州韓國留學生會)의 기관지인 『용진(勇進)』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민족혁명당 광동구당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이후 민족혁명당 화남지부의 중심 인물 역할을 하였다. 1937년 11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 한진교(韓鎭敎)의 차녀와 결혼하였고,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성자분교(成子分校) 한인특별훈련반의 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창건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참여하였다. 1940년 2월 조선의용대 조사주임에 임명되었다. 그해 봄 일부 의용대원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북상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행진곡을 작사 작곡하기도 하였다. 뤄양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자, 광복군 상위(上尉)로 제1지대 정훈조(政訓組)에서 활동하였다. 10월 24일 김원봉(金元鳳)·이상정(李相定·李然浩)·김상덕(金尙德)·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에는 김성숙 및 김약산(金若山)과 ‘외교대표파견안(外交代表派遣案)’을 제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는 등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에 참여하였다. 1943년 1월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한국청년회가 결성되자 학술부장을 맡았다. 이 청년회의 주요 구성원은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청년 당원들이었다. 그해 3월 30일 외무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4월 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행정부 소속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6월 1일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장에 임명되어 한문전단(漢文傳單) 작성을 담당하였고, 이어서 외교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1945년 6월부터 광복군 제3지대 베이징지구(北京地區) 특파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9월 18일 조선민족혁명당 비서 자격으로 중국 국민정부의 외교부를 찾아가 임시정부 및 중국 거주 동포들의 귀환 문제에 대해 회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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