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致宇
鄭致宇1870. 11. 3 ~ 1941. 7.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정용기 의병부대
- · 정환직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1870년 (음)11월 3일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자양면(紫陽面) 용산리(龍山里)에서 부친 정유경(鄭裕璟)과 모친 이경이(李敬伊)의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자는 계로(季老)이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등에 반대하는 항일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정환직(鄭煥直)은 사직하고 은둔하고 있다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을 계획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불러 의병부대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정용기는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1,000여 명에 이르는 의병을 모아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아래 중군장·참모장·소모장·도총장·선봉장·후군장·좌영장·우영장·연습장·도포장 등을 두고, 30여 부서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때 좌익장으로 임명되어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4월 정용기가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자, 의병부대는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의 지휘로 영일(迎日)·청송(靑松)·영덕(盈德) 등지를 전전하다가 해산하였다. 그해 9월 풀려난 정용기가 1907년 4월 재기하자, 영천 지역책임자로 임명되어 영천·영일·청송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7일 밤 청하군(淸河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巖)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와 접전을 벌였으나,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여러 장령들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정환직(鄭煥直)이 남은 군사를 수습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부대를 지휘하자, 군문집사(軍門執事)를 지낸 이두규(李斗圭)와 함께 영천 지역 군자금 모금책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러나 정환직도 일본군에게 붙잡혀 1907년 12월 17일 영천에서 처형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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