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雲慶
鄭雲慶1861. 2. 9 ~ 1939. 2.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좌의진
- · 정운경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 · 중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61년 2월 9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금성면(錦城面) 월림(月林)에서 정희원(鄭羲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예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지평 출신의 포군(砲軍)들로 이뤄진 의병부대가 제천으로 들어왔다. 이때 장담을 중심으로 강학하던 유중교(柳重敎)의 문인들이 호응하여 새로운 지도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조직하였는데, 월림의 문중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은 한때 충주성을 장악하고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였으며, 10개 남짓한 고을에 수성장(守城將)을 임명하여 사실상 군정 체제를 갖추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단발령이 취소되었다. 고종은 의병 해산을 촉구하였고, 많은 의병부대가 이를 따랐다. 그러나 호좌의진은 왕비의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니고 국왕의 치욕을 씻은 것이 아니며, 전통 제도가 복구된 것도 아니라면서 해산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병력을 모으고 군량을 모으면서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같은 해 (음)3월 초 경병(京兵)이 출동하여 충주 경계까지 와서 왕명을 내세우며 해산을 촉구하였으나, 호좌의진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 전군장 홍대석의 휘하에서 충주에서 제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방어하였고, 얼마 후에는 전군장이 되어 경병을 막았으며, 4월 초에는 원주 쪽으로 나아가 방어선을 쳤다. 4월 중순 청풍 쪽에서 접근한 경병이 제천으로 들어왔고, 화승총으로 무장한 의병은 우수한 무기를 가진 경병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유인석은 패주하는 의병부대를 수습하고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서북쪽으로 북상하였다. 이때 유인석을 따라 북상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호좌의진이 중국 관리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자, 유인석과 헤어져 박정수(朴貞洙)·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톈진(天津)으로 가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반년 남짓 중국에서 전전하며 고초를 겪다가 1897년 봄 귀국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농지에 대한 세(稅) 부담을 올렸는데, 지주들이 이를 소작인에게 떠넘기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대해 영춘군수에게 요구하여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위반자를 축출하자고 주장하였다. 1904년 말 유인석의 지시로 제천을 비롯한 제천·청풍·단양·영춘 등 4군 지역에서 향약이 실시되자, 영춘 향약을 이끌었다. 이 향약은 일진회(一進會)의 준동을 막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척사적 성격이었다. 1905년 가을 단발령 이후 의병 활동을 함께 한 원용팔(元容八)이 원주·제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진위대에 체포되자, 이어서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같은 해 9월 초 단양에서 동지를 규합하자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原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원건상(元建常)·장익환(張益煥) 등이 호응하였고, 장림(長林)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9월 8일 읍으로 들어가서 수순교(首巡校)·서기·향장(鄕長) 등을 장림으로 끌고 와서 각 면의 포수를 모집하도록 지시하고, 종사와 포수들을 사방으로 늘어놓아 사람의 내왕을 끊으면서 병력을 모았다. 이때 의병부대에 가입한 포군(砲軍)과 민군이 삽시간에 300~4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원주 진위대의 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결국 흩어지고 말았다. 이 일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平理院)에 구금되었고, 1906년 9월 15년 유형을 받고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삼척 의병 황청일(黃淸一), 홍주 의병 지도자인 이세영(李世永) 등과 함께 나라와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친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홍만식(洪萬植)·이상철(李相哲)·이건석(李建奭)·원용팔·채광묵(蔡光黙)·김학태(金學泰) 등을 제사하였다. 1907년 11월 고종의 특사를 받아 유배에서 풀려났다. 만년에는 월림에서 문중 지도자로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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