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鄭鏞基

鄭鏞基

1862. 12. 13 ~ 1907. 9. 2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鏞基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영천(永川)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국채보상단연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62년 (음)12월 13일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자양면(紫陽面) 검단리(檢丹里)에서 아버지 동엄(東嚴) 정환직(鄭煥直)과 어머니 여강이씨(驪江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 혹은 진택(鎭宅)이라 하였다. 가문은 고려 중기 예종(睿宗)·인종(仁宗)·의종(毅宗) 3대의 임금을 섬긴 직신(直臣)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의 26세손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영천성(永川城)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1세손이며, 성균관 생원 정하호(鄭夏濩)의 5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용맹스러웠으며, 글과 그림과 글씨의 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1876년 아버지를 따라 금릉군(金陵郡) 봉계리(鳳溪里)로 이사하였다. 아버지 정환직이 각지를 떠돌고 있었으므로 농사와 공예로 집안일을 돌보았다. 봉계리에서 10년이 못되어 자양면 검단리로 되돌아왔다가 다시 죽장면 창리(倉里)로 옮겼다. 여기서 이 지역의 이능경(李能璟)·능종(能種) 형제 등을 비롯하여 이한구(李韓久), 재종제 정순기(鄭純基)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아버지가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로 벼슬길에 오르자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하자, 반대하여 “통곡으로써 한국민을 조문한다”는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을 발표하여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행위와 실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 무렵 아버지 정환직이 고종으로부터 “경(卿)이 짐을 도우라”는 요지의 밀조(密詔)를 받았다. 이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1906년 1월, 영남 일대를 돌며 뜻있는 인사들을 모으고, 이한구(李韓久)와 함께 영천·부산 등지를 돌아 서울로 돌아왔다. 정환직은 고종의 하사금 5만 냥과 의정부 참찬(參贊)을 지낸 왕산(旺山) 허위(許蔿)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난 동료들의 모금액 2만 냥을 군자금으로 지원받아 아들이 의병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1906년 3월, 경북 영천군(永川郡) 자양면(紫陽面)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친구 이한구(李韓久), 재종제 정순기(鄭純基) 등과 함께 민중에게 「통유문(通諭文)」, 사림(士林)에게 「격려문(激勵文)」, 관리들에게 「통고문(通告文)」, 각 진영(鎭營)에 「격문」 등을 작성하여 돌리고 의병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였다. 또한 농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농민을 위안한다」는 글도 지어 돌렸다. 영천 검단리(檢丹里)에 영천창의소(永川倡義所)를 차리고 각지로 사람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한구(李韓久) 등은 청송으로 나아가 병사들을 모았다. 정순기 등은 영해(寧海) 방면으로 나아가 신돌석(申乭石)의 협조를 약속받아 왔다. 또 이규필(李圭弼) 등은 흥해(興海)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정래의(鄭來儀)를 불러들이는 등 각지의 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지역의 의병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1906년 3월 대장으로 추대되고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는 이름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부서 조직은 대장 아래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연습장 이규필(李圭弼), 도포장 백남신(白南信), 좌익장 정치우(鄭致宇), 우익장 정래의(鄭來儀), 좌포장 이세기(李世紀), 우포장 정완성(鄭完成), 장영수위 최록(崔錄), 군문집사 이두규(李斗圭) 등으로 정하였고, 전체 ‘삼난의진’의 규모는 약 1,000여 명이었다. 산남의병부대는 처음부터 서울진격작전 계획에 따라 강원도 강릉으로의 북상에 목표를 두었다. 여러 곳에 지대(支隊)로 배치된 부대들을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으로 모이도록 연락한 뒤, (음)3월 5일부터 본진을 이끌고 진군을 시작하여 영천·청송을 지나 북상 길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듣자 서울에서 모집한 의병 100여 명을 강릉의 남쪽 금광평(金光坪)으로 보내 의병부대를 맞이하도록 준비하였다. 신돌석 부대가 영해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청하읍(淸河邑) 공격을 목표로 진군하였다. 1906년 (음)4월 28일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를 지날 때,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소속 병사가 대장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주요 내용은 “어느 대관(大官)이 서울에서 붙잡혔다 하니 정대장의 부친인 것 같다. 이 일을 해결할 좋은 기회가 있기에 의논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진위대장 신석호의 편지 내용을 믿고 중군장 이한구를 불러 통솔권을 맡긴 뒤, 홀로 경주로 떠났다. 그러나 이것이 진위대의 속임수였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진위대장 신석호의 의병 해산 권유를 끝까지 거부하자 대구 감영으로 옮겨져 구속되었다. 이렇게 붙잡힌 후 이한구가 의병부대를 이끌고 영천·강구·청하 등지를 옮겨 다니다가 1906년 7월 하순경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종숙(從叔) 정치훈(鄭致壎)이 서울로 가서 정환직에게 알렸다. 정환직은 아들이 구속된 사실을 고종께 아뢰자, 고종은 특명으로 석방하도록 하였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1906년 9월 경상감영에서 풀려나 영천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의병을 준비하는 동안 애국계몽운동에도 힘썼다. 영천지역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국채보상의 취지와 필요성을 알리는 「국채보상단연회통문(國債報償斷煙會通文)」과 이 운동에 협조를 요청하는 「국채보상단연회의연금권고가(國債報償斷煙會義捐金勸告歌)」 등을 작성·발표하여 영천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힘을 쓰고 힘을 써서 의연하소 의연하소, … 강토를 보존해야 인종도 보존하리, ··· 이 돈을 어서 모아 우리 국채 갚은 후에 … ”라는 내용의 「의연금권고가」는 일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온 백성이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단연회 활동은 1906년 9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약 7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정환직이 내려와 산남의병부대를 일으켰던 옛 부장들을 만난 뒤, 관동지방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1907년 4월, 북동대산으로 들어가 산남의병부대의 부서를 조직하고 다시 일어났다. 이 때 대장을 맡고 그 아래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박태종(朴泰宗), 선봉장 홍구섭, 후봉장 이세기,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우영장 이규필, 연습장 우재룡(禹在龍), 도포장 백남신, 좌익장 정래의, 우익장 김성일(金聖一), 좌포장 장대익(張大翼), 우포장 김일언(金一彦), 유격장 임중호(林中虎), 척후장 정성욱(鄭成郁), 점군검찰 안수원(安守元), 장영집사 김진영(金震榮), 군문집사 이두규 등을 임명하였다. 1907년 7월 관동으로 북상하기 위해 그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유격장 임중호(林中虎)와 연락하며 북상 길을 찾았다. 그러나 가는 곳 마다 일본군이 가로막고 있었다. 영해·청하·청송·포항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북상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8월 말 정환직이 다시 영천으로 내려와 의병부대의 북상을 재촉하였다. 정환직은 산남의병부대의 북상을 독려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북상 일정을 결정하고 10월 6일 본부 선발대 100여 명을 이끌고 영일군 곧 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梅峴里)로 들어가 진을 쳤다. 10월 7일 저녁 무렵 일본군이 안동(安東)에서 출발하여 진보(眞寶)를 거처 영천(永川)으로 가기 위해 영일군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입암을 중심으로 연습장 우재룡(禹在龍)은 작령(雀嶺)으로, 우포장 김일언(金一彦)은 명암(鳴巖)으로, 후봉장 이세기(李世紀)는 광천(廣川)으로 가각 지대(支隊)를 이끌고 내보내 세 방향에서 일본군의 길목을 차단하도록 하고, 10월 8일 새벽 일본군을 공격하여 섬멸하기로 계획하였다. 3개 지대가 책임지로 떠났다. 7일 밤, 이세기 부대가 입암을 지나 광천으로 나아가다가 죽장면 입암리 원촌(院村)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일본군을 발견하고 공격을 하였으나, 잠복해 있던 일본군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의 집중 공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갑작스런 총성을 듣자, 본진을 이끌고 입암으로 진군하였다. 입암 원촌에 이르니 일본군은 석벽(石壁)에 의지하여 반격해왔다. 이튿날인 10월 8일 새벽까지 전투를 치렀다. 이 입암전투에서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10여 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