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준
鄭鳳俊미상 ~ ?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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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생몰연월일과 출신지역은 자료의 부족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자료에 따라 정봉준(鄭奉俊)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충청 북부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조약(丁未條約) 강제 체결에 이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경기도 음죽(陰竹)과 장호원(長湖院)에서 의병장 방인관(方仁寬)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장호원을 습격하여 일제 군경에 상당한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그 해 8월부터 경상북도 문경(聞慶)·충청북도 청풍(淸風)·괴산(槐山)·충주(忠州)·강원도 원주·경기도 여주(驪州)·지평(砥平) 등지를 무대로 활발하게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음)8월 15일 의병 700여 명을 이끌고 괴산군 칠성암(七星岩)에서 일본군 80여 명과 전투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경기도 지평 삼산동(三山洞)에서 일본군 300여 명과 3일간 교전하였다. 또한 충주군 목계(木溪)에서도 일본군 10여 명과 교전하여 그중 2명을 사살하고, 말 5필과 병기(兵器)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9월에는 충주군 과현(果峴)에서 40~50명의 의병들과 힘을 합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이후 황해 토산군(兎山郡) 황곡(黃谷)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의병부대가 흩어지게 되자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원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정낙인(鄭樂寅)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12월 상업산(祥業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07년 후반기 원주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이은찬(李殷瓚)이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하는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을 결성하자, 이에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관동창의군은 각 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11월 경기 양주(楊州)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양주에서 연천(連川) 지역 허위(許蔿)의 의병부대와 합세한 이후, 각도 의병부대가 모여 전국의병연합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13도창의대진소에서 관북 지역을 대표하는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8년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하자, 연합의병부대는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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