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龍相
相1877. 5. 22 ~ 1958. 1.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산남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산남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77년 5월 22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서면(縣西面) 수락동(水洛洞)에서 이효수(李孝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병오(炳五)이다. 일찍이 성균관 진사(進士) 민응용(閔應鏞)에게 글을 배워 통사(通史)와 경서(經書)에 막힘이 없었고, 병서(兵書) 또한 즐겨 읽었다. 성품이 온후하고 담력이 컸으며, 나라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효행을 표창 받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격분하여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동해 방면으로 진군하다가, 1906년 5월 산남 의병부대(山南義陣)에 합세하였다. 일본군의 탄압과 청송부사(靑松府使)의 선유(宣諭)로 산남의진이 해산하자, 1906년 8월 도총장 김원서(金元瑞)의 부도총장(副都總將)이 되어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영덕(盈德) 청련사(靑蓮寺)에 들어가 훈련을 시키면서 모병을 하였다. 80여 명으로 늘어난 의병을 이끌고 대장이 되어 동해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4월 산남 의병부대가 재기하자 대장 정용기(鄭鏞基)와 연락하여 동해 방면을 확보하기로 약속하고 본진의 유격장(遊擊將)의 임무를 맡았다. 그해 7월 산남의병부대가 동해 방면으로 진격할 때 이를 지원하여 청하읍(淸河邑)을 점령하고 본진으로 들어가 좌포장(左砲將)이 되어 청송·영천(榮川)·신령(新寧)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같은 해 8월 영천 자양(紫陽)에 침입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본진이 죽장(竹長)에 머물면서 북상할 준비로 군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지대를 각지로 파견할 때, 청송·진보 등지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0월 8일 죽장 입암(立巖)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본진이 무너지자 곧 바로 달려가 대장단의 장례를 치르고 남은 의병을 수습하였다. 이후 대장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대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좌포장(左砲將)에 유임되어 다시 부서를 정하고, 임시 훈련대장이 되어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군사를 훈련시켜 의병부대를 보강하였다. 청하(淸河)와 흥해(興海)를 공격하여 주요 건물을 불태웠다. 다시 20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경주(慶州)·영천 등지를 거쳐 신령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이 빼앗아 둔 민간인 엽총 400여 자루를 포함하여 많은 군수품을 확보하고 병사들도 모았다. 대장 정환직의 명령을 받고 새로 모집된 병사 200여 명을 이끌고 남쪽 경주 주사산성(朱沙山城)으로 들어가 훈련을 시켰다. 본진은 의흥(義興)·의성(義城)·군위(軍威)·청송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대구(大邱) 주둔 일본군 대병력의 출격으로 청송 등 여러 곳에서 의진 활동이 어려워지고 주사산(朱沙山)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커지자, 의병들을 청도(淸道) 운문산(雲門山)으로 옮겨 훈련을 계속하였다. 1907년 12월 정환직 대장이 청하(淸河) 각전(角田)에서 잡혀 대구로 압송될 때, 대장을 구하기 위해 장령들이 하양(河陽)에 모인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8년 2월 보현산(普賢山) 거동사(巨東寺)에서 최세윤(崔世允)이 산남의병부대 대장에 추대되고 전술은 지대별 유격전으로 바뀌었다. 이때 운문산 지역을 맡아 대장이 되고, 경주·언양(彦陽)·양산(梁山)·밀양(密陽)·영산(靈山)·창녕(昌寧) 등에서 탄약과 식량 등 군수품을 확보하였다. 그해 5월 운문산으로 되돌아와 의병부대를 정비할 무렵 접근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격퇴시키고, 의병부대를 영산·밀양·창녕 등지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6월 언양 장날 밤 언양분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처단하고 분견소를 불태웠다. 다시 언양에서 밀양·경주·영일(迎日)을 거쳐 청하에 도착할 무렵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항전하였으나 끝내 붙잡혔다. 청하분견소를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09년 9월 13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던 중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1910년 4월 보현산에서 산남의병부대의 깃발을 세우고 유격대를 조직하여 청송 동부의 서종락(徐鍾洛)부대와 서부의 남석구(南錫球)부대 등과 연락하며 활동하였다. 그해 5월 청송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군위 방면을 거쳐 6월 의성으로 물러났다가 안평(安平)전투에서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었다. 1910년 7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0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위험 인물로 지목되어 항상 감시당하였다. 대구로 거주지를 옮겨 의열단(義烈團) 및 군정서(軍政署) 등을 통해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921년 4월 독립투사를 숨겨준 혐의로 붙잡혔다가 3개월 만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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