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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弼熙

弼熙

1857. 4. 14 ~ 1900.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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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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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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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3) 1857년 4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이다. 주로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매포읍(梅浦邑)에서 살았다. 1878년 무과에 급제, 관직에 있던 중 1895년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지자 단양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 충북 제천(堤川)에서 강학을 하자, 문하에 들어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배웠다. 이어 1893년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섬겼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인석의 ‘처변삼사(處變三事)’에 따라 안승우(安承禹)와 이춘영(李春永)이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砥平, 현 양평)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제천으로 들어가 제천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냈다. 이때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군사에 서상렬(徐相烈), 선봉에 김백선, 군무도유사에 안승우, 서기에 원용정(元容正), 참모에 이필근(李弼根)을 임명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1895년 (음)12월 3일 제천군 의병장의 이름으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발표하여 전국의 충의지사가 일어나 삼천리 강토를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부대는 그해 (음)12월 5일 단양 관아를 점령하고 단양군수 권숙(權潚)을 옥에 가두었다. 같은 달 (음)8일 친위대와 단양의 장회협(長淮峽)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의병부대는 와해되었다. 흩어졌던 의병들이 1895년 (음)12월 15일 강원도 영월(寧越)에 집결하고 유인석을 대장에 추대하고 이른바 제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제천에 대장소를 차리고 본격적인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진동장(鎭東將)이 되어 원주(原州) 일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유인석의 제천 의병부대는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고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는 등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896년 (음)4월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안승우가 전사하는 등 참패한 뒤 수세에 몰렸다. 제천 의병부대는 관군과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여 평안도 지역으로의 서행을 결정하였다.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서북지방으로 파견되어 의병 모집 활동을 벌였다. 제천의병은 춘천(春川)과 양구(楊口)를 거쳐 북상을 했으나 낭천(狼川, 현 화천군)전투에서 서상렬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보았다. 유인석은 서북지방에서 관리들의 감시가 심하여 의병을 모집할 수 없다는 보고를 접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240명에 달하는 제천 의병부대는 환런현(桓仁縣) 파저강변 사첨자(沙尖子)에서 회인현재(懷仁縣宰)의 제지를 받고 (음)7월 21일 유인석과 원용정·유홍석(柳弘錫) 등 21명만이 심양(瀋陽)으로 향하였으며 나머지는 강제로 귀국하였다. 유인석 일행은 같은 해 9월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들어가 옛 제도를 회복하고, 일본을 물리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근거지로 정하고 재기를 준비하였다. 1897년 10월 춘천군 가정리(柯亭里)로 귀국하였다가 다음 해 3월 퉁화현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때 문인들과 함께 유인석의 뒤를 따라 퉁화현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 10월 거처를 팔왕동(八王洞, 현 지린성 퉁화현 재원진)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제천의병 활동 시기부터 팔왕동으로 망명한 후까지 유인석이 제자들과 질의 응답한 내용을 기록한 「팔왕동어록(八王洞語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고석로(高錫魯)·이소응(李昭應)·김화식(金華植)과 함께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10명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문인들을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춘천의병장 이진응(李晉應), 1881년 상소를 올려 사형에 처해진 홍재학(洪在鶴), 제천 의병부대에 참전하여 사망한 주용규(朱庸奎)·서상렬·이춘영·안승우·이범직(李範稷)·홍사구(洪思九), 강릉(江陵) 의병부대에 참전하여 사망한 최중봉(崔中奉), 단발령에 단식·자결한 이봉환(李鳳煥) 등이 이들이다. 공자의 탄생지인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의 궐리(闕里)를 찾아가 공자묘(孔子廟)와 공자와 자사(子思)의 묘와 사당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후손으로부터 공자의 영정을 받아 왔다. 1899년 유인석의 명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초산(楚山)에서 성묘(聖廟)를 건립할 장인(匠人)을 모집하였다. 1900년 3월 3일 팔왕동으로 돌아오던 중 흥도진(興道津)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해 죽었다. 유인석은 이후 공자와 주자를 비롯하여 우암(尤庵) 송시열, 화서(華西) 이항로,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성재(省齋) 유중교의 영정을 봉안한 성묘를 세웠는데, 받아 온 공자의 영정을 모셨다. 문인들이 제문을 바친 10명의 순절지사에 포함되어 성묘에 배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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