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在健
鄭在健1843. 6. 17 ~ 1910. 10.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경술국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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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43년 6월 17일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입면(立面) 약천리(藥川里, 옛 옥과면)에서 아버지 정최환(鄭㝡煥)과 어머니 부안김씨(扶安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계주(啓周), 호는 소송(小松)이다. 정철(鄭澈)의 가문으로 정철의 8세손이다. 1888년 과거에 응시하여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크게 기뻐하지 않고 "선비가 벼슬을 얻으면 어떻게 충성을 다해서 나라에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니 어찌 기뻐할 틈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관직에 대한 욕심보다는 관료로서의 직분에 충실히 하고자 하였다. 1892년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같은 해 9월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지만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1893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서를 내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출사할 것을 권유하면 “어지러운 때를 만나 먼 시골로 물러나는 것은 옛사람들도 했던 일이니 내가 어찌 서운해 하겠는가”라고 거절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국토마저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간신을 물리치고 현신을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연재집(淵齋集)』에 실린 계산연원록(溪山淵源錄) 중 종유록(從遊錄)에 명단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때, 일제의 침략에 위정척사운동으로 맞선 유학자 송병선(宋秉璿)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을 알현하여 그 부당함을 역설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이에 「제연재송선생문(祭淵齋宋先生文)」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추앙하였다. 의병항쟁을 펼친 기우만(奇宇萬)과 교류하였고, 1906년 최익현(崔益鉉)의 의병투쟁에 제자들과 문중 사람들을 보내어 참여시키는 등 항일 의병을 지원하였다. 1909년 옥과향교(玉果鄕校)가 철거되려고 하자 상소를 올리고 유생들을 모아 반대하여 보존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같은 해 (음)9월 3일 각처의 선영(先塋)을 찾아뵙고, 친한 벗을 방문하여 의연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10월 6일 자택 사랑채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다음, 단도로 오른쪽 목을 세 번 찔렀다. 여의치 않자 다시 왼쪽 목을 두 번 찔러 순국하였다. 천장에 상투를 맨 까닭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선비의 모습을 지키려는 자존심이었다. 유서에서 “망한 나라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다. 맹세코 명치(明治)의 세상에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음)9월 4일 신시(申時)에 칼로 베어 죽으리라”라고 자결 사유를 밝혔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는다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나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말고 열심히 농사지으며 글을 읽어라.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 나의 가르침에 부응하라”라고 하여 자신의 떳떳한 죽음에 자식들이 염려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또 부인에게 “나라를 위해 절의를 지켜 죽는 것은 신하 된 사람의 직분이오.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세 아들을 이끌고 우리 가문을 지켜주시오”라고 하여 죽음의 명분이 나라를 위한 절의임을 밝혔다. 순국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서울에는 민영환(閔泳煥) 열사가 있고, 호남에는 정재건 열사가 있다”라며 절의를 추앙하였고, 상가를 찾는 조문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고 전한다. 유해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설옥리 괘일산에 안장하였다. 유고로는 『소송유고(小松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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