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석
張基奭1860. 11. 22 ~ 191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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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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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60년 11월 22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 봉계리(鳳溪里)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한 장봉한(張鳳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장세헌(張世憲)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자는 진여(震汝)이며, 호는 자하(紫下)이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장기석(張基錫)을 썼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일찍부터 농사를 지었다. 1884년 10월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 평북동에 살던 함양 박씨(咸陽朴氏)와 결혼하였고, 이후 부인의 근면·검소함으로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1898년 39세 무렵 부인 박씨의 격려에 힘입어 공부를 시작하고 3년여 동안 집을 나서지 않고 밤낮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40세에 『소학(小學)』을 읽은 후, 벽진면 해평동에 사는 고종사촌 여심연(呂心淵)에게 수학하면서 43세에 사서육경(四書六經)을 통달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장석영·송준필 등의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고, 청천서당(晴川書堂)·회연서당(檜淵書堂)을 열어 인근의 청년들을 모아 후학을 양성하였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이 가속화되자 제자들에게 “독립 국민이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될 수 있겠느냐. 제군들은 충의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라고 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양시켰다. 그해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제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은둔하며 두문불출하였다. 같은 해 11월 3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성주군수 김구현(金龜鉉)이 참석하기를 강요하였지만, “일본 왕의 경축일에 내 어찌 참여하겠는가, 머리가 잘리더라도 발은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끝까지 거부하였다. 성주군수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일제 경찰에 의뢰하였다. 5~6명의 일제 경찰이 1911년 1월 7일 조사를 위해 집을 방문하고 구인(拘引)하려고 하였다. 이때 다음날 둘째 딸의 혼사가 있어 구인에 응할 수 없다고 버티면서, 일제 경찰을 집에 찾아온 손님인 양 술상을 대접하였다. 일제 경찰이 술잔을 내팽겨치자 크게 화를 내며 “음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나무 베개으로 내려쳤다. 이 일로 현장에서 포박당한 채 성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일본인 경찰서장은 예의를 갖추면서 “이제 합방이 되었으니 이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거부하는 이는 선생뿐입니다. 선생께서 소원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요”라고 회유하였다. 그러자 “내가 특별히 원하는 것은 없으나 만일 있다면 과연 들어줄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고 우리 대한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죽더라도 당신들을 보지 않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강하게 저항하자 일제 경찰은 회유를 포기하고 대구감옥으로 이송시켰다. 수감되자마자 1911년 1월 8일부터 단식을 시작하였다. 10여 일이 지나 거의 숨이 끊어지려 해 간수들이 죽음을 막기 위해 억지로 입을 벌리고 강제로 먹이려고 하였지만, 입에 집어넣은 음식물을 내뿜고 그릇을 빼앗아 감옥소장 등을 공격하는 등 거세게 저항하였다. 그러다가 단식을 시작한 지 27일째인 같은 해 2월 3일((음) 1월 5일) 끝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일제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이는 꺾여 부러져 있었고, 눈에는 피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경북 안동(安東) 금계리(金溪里)에 거주하던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이 유해를 수습해 성주군 본가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1911년 3월 8일 장례를 치를 때 경북 지역과 인근 지역 유림 10,000여 명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충절을 추앙하였다. 1936년에도 전국 유림에서 충의와 절의를 기리기 위해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마을 자양산(紫陽山) 아래에 건립하였다. 이때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무런 내용 없이 ‘해동청풍’ 네 글자만 비문에 새겨 넣었다. 비문은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독립운동가 이동흠(李東欽)이 글씨를 썼다. 그러나 일제는 건립된 비의 의미를 알아채고, 1937년 4월 “장기석은 평생 일본을 반대했고, 해동청풍비는 조선의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므로 파괴한다”라고 하며 비를 부수고자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부인 박씨는 해동청풍비 뒤 고목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해동청풍비를 조각내어 근처 냇가에 버렸고, 박씨 부인에 대한 조문도 받지 못하게 하고 공동묘지에 강제로 매장하게 하였다. 광복이 되고 1946년 문인인 장진영(張鎭永)이 김구(金九)·김창숙 등과 해동청풍비의 복구를 논의하여 경북지역 인사들과 함께 재건하였다. 일제가 부순 비의 조각을 찾아 모으고, 철심으로 이어 다시 세웠다. 비문은 다시 김창숙이 짓고, 글씨는 김구가 썼다. 경북 유림들은 박씨 부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해동청풍비 옆에 ‘박유인기열비(朴儒人紀烈碑)’를 세웠다. 1972년 셋째 아들 장진상(張鎭祥)을 비롯한 후손들이 유고(遺稿)를 모아 『자하선생실기(紫下先生實紀)』를 편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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