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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東曦

崔東曦

1890. 1. 4 ~ 1927.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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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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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원(淸原)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청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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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고려혁명위원회
  • · 고려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0년 1월 4일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현 청주시 청원구)에서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과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누이동생인 손소사(孫召史)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종로구(鐘路區) 가회동(嘉會洞)이다. 이명은 소수(素水)이다. 동학 지도자인 손천민(孫天民)으로부터 한문과 유교 및 동학 교리 등을 배웠다. 서울의 서강(西江)에 정착하여 살던 중 손병희의 권유로 1904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야간부와 다이세이중학교(大成中學校)를 거쳐 20세 되던 1909년에 와세다대학(早滔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고 다음해 정경학부로 진학하였다. 대학 시절 정치사상가 야노 호미노(失野文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그가 저술한 『신사회』를 즐겨 읽었다. 이 책은 영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소개한 것으로 일본에 보급한 사람은 아베 이소(安部磯雄)였다. 아베는 당시 와세다대학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사회주의론’은 명강의로 유명하였다.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주변에는 손병희에 불만을 갖고 있던 천도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시천교(侍天敎)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박상진(朴尙鎭)과 후일 의열단 창립에 관여한 황상규(黃尙奎)로부터 천도교가 항일운동에 앞장설 것을 당부하는 말을 들었다. 1916년 2월 손병희에게 천도교 개혁과 항일운동 전개를 건의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1918년 3월 베이징(北京)을 거쳐 지린성(吉林省)으로 건너갔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천도교의 대외적 민족운동을 주선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4월 1일 귀국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으로 주요 간부들이 옥고를 겪는 동안 교단을 지키고 있던 교주 박인호(朴寅浩)와 대종사장 정광조(鄭廣朝)로부터 자금 제공을 거절당하였다. 이에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2,000원을 구해 다시 만주로 떠났다. 당시에는 일본의 대정치가와의 회담을 통해 한국의 독립 취지를 관철시킨다는 소극적인 외교투쟁을 구상하고 있었다. 직접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접촉하였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지린성을 돌아와서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후신인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 참여하였다. 이후 외교론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과 그 근거지 마련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였다. 약 100,000원 상당의 토지를 확보하고 국내의 천도교인을 비롯한 여러 동포들의 이민을 장려하여 5,000호 단위의 대규모 한인촌을 조성하고, 군관학교를 설립한 뒤 무장독립군을 양성하여 일본과 본격적인 항전을 준비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9월 “동학에 관심이 있다”는 레닌을 만나 만주에서 한인촌 건설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하였으나 레닌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며 거절하였다. 이 무렵 국내 천도교 인사들이 손병희의 보석운동을 위해 귀국을 종용하자, 1919년 11월 귀국하여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만나 손병희의 보석허가를 얻어냈다. 1920년 9월 대구(大邱)에서 최완(崔浣)·이근호(李根湖) 등을 만나 ‘만주에 중립국을 건설하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할 것, 러시아 과격파와 서로 결탁해 무력침입을 할 것, 조선인 경찰 관리를 매수할 것’ 등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붙잡히기도 하였다. 한편 1919년 귀국 직후부터 김한(金翰)·박일병(朴一秉)·원우관(元友觀)·주종건(朱鍾建) 등 각종 노동단체나 사상단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와 좌파 지도자들을 자주 만났고 때론 식객으로 거두었다. 또한 천도교의 제도 혁신·인물 선택·교육 장려·해외 포교·재정 정리 등을 골자로 하는 혁신운동도 추진하였다. 1920년 말부터 ‘시대의 요구와 정의의 공론’이라는 취지를 내세우며 혁신운동을 지지하는 혁신파를 규합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1921년 4월 6일 개최된 총회에서 결실을 맺었다. 총회에서 대의제적 기구인 의정회(議正會)를 설치하는 등 민주적 제도를 도입한 혁신안이 통과되었고, 이어 전국을 60개 구역으로 나누어 의정원(議正員)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고 18세 이상의 교인 누구에게나 1표를 부여하는 보통선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즈음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천도교 지도자들이 잇달아 풀려나 혁신파를 지지하였다. 이에 고무된 혁신파는 교주를 선거로 선출하고 종무원은 행정을, 종의원은 입법과 예산심의를, 종법원은 교화를 담당하는 3권 분립의 실현을 골자로 하는 개혁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기존 교단을 장악하던 보수파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손병희가 제동을 걸고 보수파가 반격하면서 집단지도체제로의 개혁에 그치자, 혁신파와 함께 천도교단을 이탈하여 1922년 12월 천도교연합회(天道敎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이후 천도교 혁신파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운동단체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였다. 1922년 7월 14일 천도교내 지하 독립운동 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홍병기(洪秉箕)를 선임하는 한편, 자신은 부위원장과 외교부장을 겸임하였다. 하지만 천도교 보수파의 반격으로 국내에서 입지가 곤란해지자 다시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연해주에서는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을 상대로 외교공작을 전개하였다. 먼저 코민테른 간부들에게 서신을 보내 천도교인이 주도하는 무장투쟁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24년 12월 17일에는 소련 외무성 인민위원부에 군대 결성과 활동에 관련한 비밀협정을 체결하자는 비밀서한을 보냈다. 여기서도 천도교의 주체적 역량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외교공작은 1925년 1월 20일 「소·일 상호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어 소련이 민족운동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협약에 따라 그해 2월 소련에서 추방당하였다. 이후 지린으로 돌아와 정의부(正義府) 지도부와 제휴하는 한편, 정의부 내에서 활동하던 다물당(多勿黨) 간부들과도 접촉하였다. 이들과 만주를 근거지로 무장투쟁과 외교공작을 추진할 통일전선체 결성에 합의한 뒤, 1925년 8월 천도교 혁신파이자 형평사 간부인 이동구(李東九)를 창춘(長春)으로 불러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비밀혁명당을 조직해야 하니 군이 조선에 잠입하여 동지를 규합하라”라는 지령을 내렸다. 1926년 2월 15일부터 16일 양일에 걸쳐 양기탁(梁起鐸)·주진수(朱鎭洙)·이일심(李一心)·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 등과 함께 6인이 회합을 갖고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직·선언·강령·규칙 제정과 국내외로의 특파원 파견, 창립대회 소집 등의 안건을 협의하였다. 같은 해 3월 초에는 이동구가 서울로 귀환하여 천도교연합회 간사로 있던 김봉국(金鳳國)·송헌(宋憲), 천도교연합회 간부이자 형평사 간부 이동락(李東洛), 형평사 집행위원 오성환(吳成煥) 등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고려혁명당은 천도교의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동학 제1대 교주 최제우의 득도일)인 1926년 4월 5일 지린성 영남반점에서 공식 창당되었다. 이때 고려혁명당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지원을 받기 위한 외교공작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당대표 자격으로 베이징(北京)에서는 소련의 베이징공사 카라한(Karakhan, Lev Mikhaylovich)을, 상하이(上海)에서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대표인 보이틴스키(Voitinsky, G. N.)를 만나 고려혁명당에 대한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중국 국민당 당수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군사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중국인 부호 한릉거에게는 군관학교 설립자금 지원을 약속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려혁명당 결성 직후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김규식(金奎植)의 집에 거처하던 중, 위장병이 발병하여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고려혁명당 간부 이동락이 1926년 12월 28일 하얼빈(哈爾賓)으로 가던 도중 발각되어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두 달 만에 73명의 고려혁명당 당원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악화되면서 1927년 1월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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