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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성

張寒星

1895. 3. 3 ~ 193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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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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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용강(龍岡)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용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고려혁명군
  • · 국민부
  • · 정의부
  • ·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 ·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95년 3월 3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영월면(寧月面) 송정리(松亭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장한성(張漢成)·장지호(張志鎬·張智鎬·張志浩·張智浩)를 사용하였다. 가족으로는 어머니 정씨(鄭氏), 아내, 딸 장공자(張恭子), 형 장중호(張仲浩), 여동생 장순호(張順浩) 외 누나 2명, 여동생 1명이 있었다. 어린 시절 진남포(鎭南浦)에서 삼숭학교(三崇學校)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을 다니다가 중도에 퇴학하고 평양(平壤)으로 가서 남문통(南門通)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4년 봄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 수청(水淸) 치마우(馳馬隅)로 이동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6년 12월 옌지현(延吉縣) 상의사(尙義社)에 있는 영생학교(永生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봄 연해주 내수청(內水淸)에서 조직된 무장자위대 제4대장에 선임되었다. 연해주 일대에서는 중국인 마적들이 일본군과 협력하여 한인 촌락에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었다. 마적 토벌을 목적으로 무장자위대를 조직하였으며, 이 부대는 후에 창해소년단(滄海少年團)으로 개편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초 연해주 외수청(外水淸) 철산동(鐵山洞)에서 독립군 대원을 모집하였다. 10월에는 허중권(許中權)·최익룡(崔翊龍)과 함께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1921년 3월 옌지현 숭례향(崇禮鄕) 옹성랍자(甕聲磖子)에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제9구분단(第九區分團) 서기로 활동하였다.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시베리아조선인교육연구회 창립총회에 강양오(姜揚五)·임호(林虎)·이범석(李範錫) 등 54명과 함께 발기인으로서 참석하였다. 1922년 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지방대표 오종환(吳鍾煥), 고려혁명군 공산당 대표 최충신(崔忠信), 솔밭관[송전관(松田關)] 지방대표 이병국(李秉國), 고려공산당 대표 고명수(高明秀) 등 50여 명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러시아 적군(赤軍)이 고려혁명군을 무장해제 시킨 상황에 관해 논의하였다. 러시아 내전 시기 치타정부와 원동부(遠東部)에서는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기 전에 한인 독립군 부대가 내전에 참가하여 “공적이 있으면 후일 연해주 내에서 조선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특별자치구역을 주고 조선 독립운동을 원조하겠다”라고 내약(內約)한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혁명군은 적군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11월 3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이후 적군은 고려혁명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1922년 말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籌備會) 특파원 정성규(鄭成奎)를 만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될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정성규의 소개로 고려혁명군 제3대(第3隊)에 참가하여 경리부에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고려혁명군 제3대장 김정하(金正夏)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1922년 12월 6일 최군신(崔君信)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다. 1923년 1월 3일 상하이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국민대표준비회에 참석하였다.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 정식대회에 임병극(林炳極)과 함께 고려혁명군 사령부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2월 6일 회의에서 문시환(文時煥)·임원(林源)·방국춘(方國春)·유신(柳藎)·이하서(李河西)·강일(姜逸)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노동분과위원에 선임되었다. 3월 8일 노동분과위원을 사임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당시 의열단(義烈團) 간부 장건상(張建相)과 만나 국내에서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서울에서 경성교육회(京城敎育會) 유진태(俞鎭泰), 청년연합회 최순탁(崔淳鐸), 대종교(大倧敎) 조용뢰(趙庸雷) 등과 만나 국내에 독립운동기관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23년 3월 10일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난징(南京)-톈진(天津)-펑톈(奉天, 현 瀋陽)-안둥현(安東縣, 현 단둥(丹東))을 거쳐 신의주(新義州)에 도착하였다. 3월 21일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로 가던 중 백마역(白馬驛)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져 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23년 5월 1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5년 8월 4일 풀려나 평양 장별리(將別里) 친척집에 잠시 머물렀다. 출옥 직후 신문기자와 만나 평양형무소의 상황을 폭로하였다. 평양형무소에는 징역 10년 미만의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형무소 내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수형자를 심하게 차별한다는 것이었다. 종종 한국인과 일본인 수형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형무소 측에서는 한국인 정치범을 주모자로 간주하여 독방에 가둔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간도(間島)로 이동하여 한민여학교(韓民女學校)를 설립하였다. 1927년 1월에는 용정(龍井)에서 노동단체 동창조합(同昌組合) 조합장으로 활동하였다. 7월 16일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 분규사건 대책회의에 참가하여 “동흥학교는 간도교육계에 악영향을 파급”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이 시기 안기성(安基成)·최원택(崔元澤)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 조직에 관여하였다. 동만구역국 조직원들이 간도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 당시 용정을 빠져나와 돈화(敦化)로 피신하였다. 이후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12월 김성신(金成信)·박동규(朴東奎) 등과 함께 간도 소모록구(小母鹿溝)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항일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중국 펑톈성(奉天省, 현 랴오닝성) 당국과 1925년 6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따르면 중국 관헌은 독립운동단체를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국 관헌이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일제에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협정이 본격 시행되면서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은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되었다. 한편, 중국 관내(關內)에서는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 사이에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내에서도 신간회(新幹會) 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에서는 정의부(正義府)에서 주도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가 개최되었다. 1929년 1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3월 지린성(吉林省)에서 민족유일당조직동맹 회의가 열렸고 4월 1일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가 통합되어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었다. 국민부 성립 당시 양기하(梁起河)·김관웅(金觀雄)·문학빈(文學彬)·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 등 22명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9월 27일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中央議會)에서 이성근(李成根)·박재훈(朴在勳)·이진탁(李辰卓)·김돈(金敦)·임동환(林東煥)·이영희(李英熙)·안홍(安鴻)·김성장(金成璋)·고이허와 함께 외무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3월 국민부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서 대원들과 함께 용정 시외(市外) 흥신동(興新洞), 다조구(茶條溝), 옌지현 용지향(勇智鄕) 삼봉동(三峰洞)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조선총독정치시정2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가 경복궁에서 9월에 개최할 조선박람회 기간에 동지 20명과 함께 서울에 침투하여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옌지현 옹성랍자에서 모연대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중 1929년 11월 30일 오전 6시경 간도일본총영사관 경찰서 무장경관 10여 명이 모연대 숙소를 포위하여 대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당시 무장경관대를 지휘하는 경부보(警部補)를 사살하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1930년 2월 14일 지린에 있는 정미소에서 와병(臥病) 중에 중일합동경관대(中日合同警官隊)에 붙잡혀 길림공안국(吉林公安局)에 구금되었다. 길림일본총영사관에서는 길림공안국에 인계를 요구하였으나 그해 4월에 풀려났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 관련 혐의로 다시 중국 측에 붙잡혔다가 1931년 3월 11일 길림감옥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동지들에 의해 지린 북산(北山)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시신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고 일제가 중국 측에 항의하자 1931년 3월 15일 중국검찰청에서는 시신을 안장한 동지들에게 봉천의원(奉天義園)으로 이장할 것을 요구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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