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장창헌

張昌憲

1884 ~ 1924. 7. 1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창헌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북 용천(龍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 · 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 기습공격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북중면(北中面)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만주로 넘어 온 시기와 경위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였다. 본격적인 활동상이 자료상으로 나타나기는 경신참변(庚申慘變) 이후부터다.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서북간도 독립군기지와 한인사회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침입하였다가 물러난 이후 퉁화현(通化縣)에 있는 독립군기지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돌아온 신광재(辛光在)·이병철(李炳哲)·백설령(白雪嶺)·채찬(蔡燦) 등과 폐허가 된 진영을 다시 세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1921년 5월 연해주에 있는 홍범도(洪範圖)부대에 연락해 장총·권총·탄약과 같은 무기를 지원받았다. 그 해 7월부터 돌아온 대원들로 유격대를 결성해 다시 본격적인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하반기가 되자 경신참변 시 떠났던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소속병영을 찾아 돌아왔다. 이에 남만주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단체 통합운동을 벌였다. 힘을 합해 폐허가 된 독립군기지와 한인사회를 재건하고, 보다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노력의 결과 1922년 8월 환런현(桓仁縣)에서 17개의 단체를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통의부는 김동삼(金東三)을 총장, 채상덕(蔡相德)을 부총장으로 선임해 최고지휘부를 만들고, 그 아래 민사·재무·학무·교섭·권업·군사·참모·법무 등의 행정부서를 설치하고,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할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김창환(金昌煥)이 사령관인 의용대는 5개 중대와 유격중대, 헌병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이 중 서로군정서에서부터 같이 활동해온 채찬이 중대장을 맡은 제1중대에 소속되었다. 성립 초기에는 간부진에 포함되지 않았다가 1923년 중반 쯤 소대장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아 통의부 내부는 구성원 간 이념적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주장하는 전덕원(全德元)·채상덕(蔡相德) 등이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1923년 초 의군부(義軍府)를 만들어 나갔다. 이어 1923년 후반에는 독립군이라면 오직 항일무장활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노선을 가진 채찬·김원상(金元常) 등이 이탈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한 후 1924년 상반기 임시정부 산하 군대임을 선언하며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켜 나갔다. 참의부에 가담한 주력은 통의부 제1·2·3·5 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였으며, 소수의 의군부 세력이 가담하였다. 이들 세력은 새로운 독립군단인 참의부를 만들고자 하는 명분을 대외에 알리기 위해 1924년 4월 1일 ‘남만(南滿)의 군민(軍民)에게 경고함’이란 고지문을 발표하였다. 이 고지문에 채찬·김소하(金筱廈)·김선풍(金旋風) 등과 함께 통의부 제1중대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어 같은 달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를 만드는 사실을 선언한 선언서에는 채찬·최석순(崔碩淳) 등 77명과 함께 재남만(在南滿)군인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 같은 고지문과 선언서를 발표해 그 명분을 대외에 천명하면서, 같은 4월, 싱징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서 채찬·김소하 등과 육군군사의회(陸軍軍事議會)를 개최해 참의부 기치하의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참의부는 구성원들의 노선이 말해주듯 이 단체는 항일무력 활동에 치중해, 민정조직은 군사활동을 지원해줄 민사부 하나와 입법기관인 중앙의회만 있고 나머지 모두는 군사조직이었다. 군사조직은 1중대부터 5중대까지 5개 중대와 독립소대 및 훈련대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이 군사력은 한 근거지에 포진한 것이 아니라, 국내진입이 쉬운 국경지방인 지안(輯安)·환런·퉁화현의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 같은 참의부의 제2중대 1소대의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참의부가 성립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24년 5월 중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인 채찬의 명령을 받고, 한웅권(韓雄權)·이춘화(李春化)·김창균(金昌均)·현성희(玄成熙)·이명근(李明根)·김여하(金呂河)·전창식(田昌植) 등 7명과 함께 유격대를 편성해 그 지휘를 맡았다. 유격대는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근거해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1924년 5월 19일, 굴곡으로 이루어져 험난한 평북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으로 가 매복하였다. 매복한 대원들 앞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다. 정오를 조금 넘긴 12시 30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탄 국경순시선이 강 가운데 나타났다. 이에 순간적으로 집중사격 하도록 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따라 대원들은 일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날아오는 총알에 놀란 일제의 순시선은 혼비백산해 전력 질주해 도주하였다. 이 공격으로 안타깝게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 조선총독의 모습은 온 세상에 알려져 대외적으로는 큰 망신을 샀고, 한국 독립군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다. 이어 6월에는 이응서(李應瑞)·이정빈(李正斌)·이창화(李昌華) 등 7명으로 또 다시 유격대를 만들어 국내로 진입하였다. 평북 강계군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곡소면(曲沼面) 쌍부동(雙富洞)에 사는 백봉기(白鳳琦)란 자가 독립군과 대적하기 위해 일제의 앞잡이인 자위단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에 백봉기를 처단하기 위해 6월 21일 쌍부동에 갔으나 자위단 활동을 위해 나가고 없어 그의 두 아들 봉빈(鳳濱)과 영빈(永濱)을 처단하고 가옥을 소각하였다. 7월에는 대원 일부를 교체해 장기간 국내활동을 위해 강계군 종서면(從西面) 황청동(黃淸洞)의 밀림에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국내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이 위험한 일이었지만, 보다 효과적인 유격전을 위한 것이었다. 밀림을 드나들며 활동하던 중 밀정 홍인화(洪仁化)란 자의 감시망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홍인화의 밀고에 의해 7월 13일 대규모 일본군이 공격해 왔다. 유격대도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서 부하 대원인 이춘화·김용규(金用奎)·이용연(李用淵)과 함께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