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民鎬
民鎬1904. 1. 3 ~ 1970. 7.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8) 1904년 1월 3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창두면(昌斗面) 창태동(昌太洞)에서 아버지 임현기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임종호(林鍾浩)·임민호(林閔虎)·임태갑(林太甲)·임춘남(林春南)·민호림(閔虎林)·심도빈(沈道斌)·따로프·김창섭(金昌燮) 등이다. 1905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 정착하였다. 조부를 비롯한 가족들은 천주교 신자였다. 용정촌에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지자, 1913년에는 화룽현(和龍縣) 동성촌(東城村) 고성둔(古城屯)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황무지 세 곳을 개간하였으며, 양태운이라는 한족의 땅에서 소작을 하였다. 가난에 시달렸던 집안은 점차 형편이 좋아졌고, 땅을 소유하고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장흥동(長興洞)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한국어, 역사, 지리 등을 배웠다. 1918년 장흥동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가정 형편을 고려하여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에 전념하였다. 1919년 용정촌에서도 국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3월 13일 대규모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천주교 교회에서 종이 울리면 시위가 시작하기로 했지만 일제 경찰에 의해 봉쇄당한 상태였는데, 친구 1명과 함께 몰래 교회에 잠입하여 종을 울려 시위가 진행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20년 동흥중학(東興中學)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 3학년이었던 1922년 같은 반 친구 김세광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한국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길로 들어섰다. 1922년 2월 노창률 등과 함께 장흥동에서 동구청년회(東球靑年會)를 결성하고, 문예, 체육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청년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1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융안현(寧安縣)에서 박윤서·김세광 등이 동흥중학을 중심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청년 단체였던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동흥중학소조를 결성하였다. 1923년 4월 졸업 후 용천동(龍泉洞)소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고급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소년대를 건설하였다. 이와 함께 야학을 운영하며 청년들과 부녀자들에게 한국어, 산수, 주산 등 문맹퇴치를 위한 과목들을 강연하였다. 1923년 5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외곽조직으로 용천동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4년 4월 화룽현 두도구(頭道溝)에서 『동아일보』 지국 기자로 근무하며 평강구에 있던 각 지역에 있던 고려공산청년회 비밀 조직과 청년회를 통합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고려공산청년회 평강구위원회(平崗溝委員會)를 조직하게 되었고,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1925년 5월 두도구·평안촌(平安村)·장흥동·용천동·약수동(藥水洞)·이도구(二道溝)·사도구(四道溝)·개척촌(開拓村)의 9개 청년회를 연합하는 데 앞장섰고, 숭신향(崇信鄕)청년연합회가 결성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26년 1월 동만청년총연맹에 숭신향청년연합회를 가입시켰으며,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었던 ‘만주공청’그룹의 간부회의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순의 추천으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0월에 열린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구위원회 성립 대회에서 안기성·현철종·이주화·김소연·이순·김복만·채세진·박두환·임계학·김규극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상무위원으로 선발되었다. 또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조직 창설에 앞장섰으며 김기철·김용호·김형복·박창섭·박정길·이문호 등과 함께 주요 책임자가 되었다. 1927년 5월 1일 용정과 두도구에서 메이데이를 기념하여 군중 대회와 시위 행진을 전개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일제 경찰이 혁명 단체들을 수색하고 주요 인사들을 잡아들인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이 일어나자,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1928년 1월 코민테른 블라디보스토크 연락부가 주최하여 소련 세바스토폴에서 열린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 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이후 헤이룽장성 방정현(方正縣)에서 농사를 지으며, 당·공청 조직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에 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32년 5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태평양노동조합 블라디보스토크 사무국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함남 함흥, 흥남지구 등에 파견되어 적색농조조합을 건설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일환으로 『노동자신문』, 『뉴스』 등을 발행하였고, 흥남화학 노동조합 세포조직, 홍원통조림공장 지도그룹 등을 조직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33년 3월 말 ‘제3차 적색태평양노조사건’이 계기가 되어 함경남도 흥남경찰서(興南警察署)에서 출동한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1935년 3월 1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16일 함흥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으며, 그해 6월 29일부터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이감 중 만세를 불러 징역 10개월이 추가되었고, 1941년 6월 18일 풀려났다. 출소 후 1942년 봄까지 토목회사 동광조(東光組) 화룽현 출장소, 둔화현(敦化縣) 목재채벌소에서 근무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 봄에는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고, 근로봉공대에 강제 징용이 되었다. 광복 이후 둔화현에서 민주해방 동맹을 건립하고 친일파를 숙청함과 동시에 한인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둔화현 인민정부 부현장, 길림일보사 부사장, 연변일보사 사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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