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基弘
基弘1905. 11. 14 ~ 1933. 3.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천마산대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 · 민족유일당조직동맹
- · 국민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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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2010) 1905년 11월 14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옥상면(玉尙面) 좌동(佐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를 달리한 임기홍(林起弘)이다. 천마산대(天摩山隊)·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천마산대는 1919년 만세운동 직후 최시흥(崔時興)·최지풍(崔志豊)·박응백(朴應伯)·최천규(崔天柱)·김세진(金世鎭)·심용준(沈龍俊) 등이 의주군·구성군(龜城郡)·삭주군(朔州郡) 경내에 위치한 천마산에 근거를 두고 조직한 단체이다. 독립운동자금 모집, 일제 주요기관 파괴, 일제 군경과 친일행위자 처단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20년 (음)6월 의주군 옥상면 좌동에서 천마산대 대장 최시흥과 만나 천마산대에 참가하였다. 1920년 (음)7월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1920년 10월 2일 일제가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2만 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간도(間島)를 침공하였다. 10월 초에서 11월 말 사이 일제는 간도 한인 3천 여 명을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이 시기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무장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1921년 4월경 일본군이 철수한 후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로 되돌아 와 부대를 정비하였다. 이후 1922년 1월 남만주에서는 각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922년 8월 23일 펑톈성(奉天省, 현 요녕성)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 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部) 등 대표 70명이 참석하였다. 이들이 7일간 회의를 거쳐 8월 30일 통의부가 조직되었다. 이때 환런현 상루하(上漏河)에서 통의부에 참가하여 제3중대 상등병(上等兵)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 통의부 의용군 김용택(金龍澤)·이학현(李鶴賢)·이창순(李昌淳)·김영화(金永化) 등과 함께 평북 희천군(熙川郡) 장동면(長洞面) 옥동(玉洞) 공석용(孔錫庸)의 집을 비롯한 4~5곳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한편, 통의부에는 조직 당시부터 공화주의계열과 복벽주의계열 사이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여기에 군사력을 지휘하는 문제까지 더해져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결국 1923년 2월 복벽주의계열이 통의부에서 이탈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위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924년 4월 1일 통의부 의용군 제1·2·3중대, 유격대, 독립소대 대표 78명이 모여 육군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최지풍·박응백·김상옥(金尙沃)·김용택(金龍澤)·김득성(金得成)·맹성록(孟性祿)·유광흘(劉光屹)·심용준 등 20명과 함께 제3중대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여러 단체가 단결해야 하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로 활동할 것을 천명하고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이하 참의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음)7월 참의부 참사(參士)로 활동하면서 내무(內務) 사무에 종사하였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가 항일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중국 펑톈성 당국과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따르면 중국 관헌은 독립운동단체를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국 관헌이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일제에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협정이 본격 시행되면서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은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되었다. 한편, 중국 관내에서는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 사이에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내에서도 신간회(新幹會) 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에서는 정의부(正義府)에서 주도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가 개최되었다. 1928년 5월 12일부터 반석현(盤石縣)과 화전현(樺甸縣)에서 열린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를 계기로 참의부는 심용준파와 김소하파(金篠夏派)로 나뉘게 되었다. 민족유일당 조직 방법에서 심용준파는 “단체 본위 조직론”을, 김소하파는 “개인 본위 조직론”을 주장하였다. 단체 본위 조직론은 기존의 작은 단체를 기초로 하여 그들을 연합하는 방식으로 유일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 본위 조직론은 기존의 단체는 대부분 지방적이고 파벌적이므로 개인 위주로 유일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928년 9월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정의부 주류파, 신민부(新民府) 민정위원회계열(民政委員會系列)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결성하였다. 1929년 3월 지린(吉林)에서 참의부 대표 심용준·유광흘, 정의부 대표 이동림(李東林)·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고할신(高轄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신민부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동맹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거쳐 3부가 통합하여 4월 1일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었다.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되었고, 무장대오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성립되었다. 1929년 5월 28일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中央議會)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외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4월 말까지 외무집행위원으로서 지안현(輯安縣)·신빈현(新賓縣)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5월 신의주(新義州) 대안에서 조영화(趙永化)·박재훈(朴在勳)·최병환(崔炳煥)·임우송(林宇松)·사병익(史秉翼)과 함께 일제에 붙잡혀서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신의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그해 7월 18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2년 6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강도죄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33년 3월 16일 평양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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