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林國楨

國楨

1894. 3. 25 ~ 1921. 8. 25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國楨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함흥(咸興)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간도 15만원 탈취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4년 3월 25일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중하리(中荷里)에서 태어났다. 1905년 부모와 함께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하였다. 보통학교를 거쳐 간도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14년 북간도에 소재한 3개의 중학교 학생들이 모여 조직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단원이 되었다. 이어 같은 해 8월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의 대전학교(大甸學校, 일명 나자구무관학교 또는 동림학교)에 입학하여 무관교육을 받았다. 대전학교는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광복을 이루고자 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가 설립한 독립군 무관양성소였다. 이종호(李鍾浩)가 제공한 설립 자금 1,000원을 바탕으로 이주 한인들이 힘을 합해 교사와 기숙사를 건축하여 설립되었다. 북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의 선두 주자들인 김립(金立)·김규면(金奎冕)·오영선(吳永善)·김영학(金永學) 등이 교관을 맡아 서북간도 및 연해주 등지에서 몰려든 한인 2세들을 독립군 무관으로 양성하였다. 특히 북간도 옌지현(延吉縣)의 광성학교(光成學校)·창동학교(彰東學校) 졸업생 및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이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대전학교는 설립 후 약 2년간 많은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항일과 군사교육에 치중한 대전학교는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1916년 일제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 학교를 폐교시키고 말았다. 학교가 폐교되자 동료 학생들과 러시아 우랄지방으로 갔다. 그곳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수품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였다. 군수품 만드는 기술도 배우고 독립운동 자금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우랄지방에 도착한 학생들은 김병학이라는 인력 청부업자에게 속아 우랄산에 있는 목재소로 팔려가고 말았다. 목재소에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러시아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해주에서는 싼값에 무기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의 노력으로 목재소를 나와 동료들과 북간도로 돌아왔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북간도의 한인들도 3월 13일 룽징(龍井)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북간도지역에서는 5월 초까지 옌지·훈춘(琿春)·왕칭·화룽현(和龍縣) 등 한인사회가 형성된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철혈광복단 단원들과 힘을 합해 이들 만세시위의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만세운동의 여세를 몰아 1919년 중반, 북간도지역 청년들이 조국 독립을 향한 의지를 모아 간도청년단(間島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운동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간도청년단은 러시아 연해주에 성립된 국민의회(國民議會)와 연결되어 정세를 보고하고, 북간도지역 독립운동의 발판을 구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김하석(金夏錫)이 북간도로 와 최이붕(崔以鵬)을 만나 독립전쟁에 사용될 무기 구입의 시급성에 대해 얘기하였다. 두 사람은 무기구입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그 대책을 논의한 결과 일제의 조선은행 지점을 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작전의 모든 추진 사항은 최이붕과 윤준희(尹俊熙)가 주도하여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인 그와 한상호(韓相浩)·박웅세(朴雄世)·김준(金俊) 등에게 연락을 취하며, 거사계획을 구체화 시켜갔다. 이들은 작전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조선은행 룽징촌지점 서기인 전홍섭(全洪燮)과 접촉하였다. 1919년 12월 31일 전홍섭은 조선은행 룽징촌 지점장 이케다 고로(池田五郞)가 일본인 타게다 지로(武田二郞)와 나누는 비밀대화 속에, 1월 중 회령지점에서 현금이 수송되며, 이 현금은 옌지의 와룡동(臥龍洞)을 거쳐 왕칭현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전홍섭은 이 내용을 즉시 최이봉에게 알렸고, 단원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920년 1월 2일 전홍섭은 서면으로 확정된 현금수송일을 단원들에게 전달하였다. 연락받은 단원들은 1월 3일 명동촌(明東村) 향교동(鄕校洞)에 있는 김계하(金桂河)의 집에 모였다. 이곳에서 단원들은 실질적인 마지막 작전 계획을 짜고, 작전 중 지켜야 할 사항들을 협의하였다. 이들이 만든 협의 사항은, 만일 작전 중 인명을 살해하면 일제가 북간도 한인들에게 보복행위를 할 것이니 결코 인명은 살해하지 말 것, 취한 돈은 반드시 공중을 위해 사용할 것, 권총은 시위를 위해 각자 휴대할 것, 호위자를 포박하기 위한 마승을 휴대할 것 등이었다. 거사일인 1월 4일 오후 4시, 윤준희·김준·박웅세가 한 조가 되고, 최이붕·한상호와 함께 한 조가 되어 작전 장소인 회령에서 북간도로 오는 길목인 동량(東良) 상리사(上里社) 동량어구(東良於口)에 모였다. 모인 즉시 윤준희 조는 회령 방면으로 이동해 현금수송차가 도착하는지를 망을 보았다. 최이붕 조는 동랑어구 버드나무 뒤에 숨어 앞 조의 신호를 기다렸다. 5시 반, 윤준희 조가 수송차가 오고 있음을 알렸고, 최이붕 조에 가까이 오자 단원들이 일시에 덮쳐 현금 15만원을 성공적으로 탈취하였다. 현금 15만원을 확보한 단원들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자금을 마련하였으니 무기를 구입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최초 계획자인 김하석을 만나 러시아 화폐로 환전하였다. 윤준희 등과 함께 자금을 나누어 관리하였으며, 무기 구매의 책임을 맡았다. 무기구입에 나서 장총 1,000정과 탄환 백만 발, 속사포 및 폭탄 등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사령부 포병부 무기고 책임자와 거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 무기를 구입하는데 다리 역할을 해준 사람은 일제의 밀정인 엄인섭(嚴仁燮)이었다. 엄인섭은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연해주 의병을 이끈 인물이기도 했으나, 이때는 이미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이 되어 있었다. 결국 엄인섭의 밀고로 1920년 1월 31일 밤, 윤준희·한상호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제의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이후 2월 초,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서울-원산을 경유해 2월 17일 일제의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었다. 청진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상고하였으나, 1921년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