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恒鳳
恒鳳1898. 3. 15 ~ 1920. 11.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8년 3월 15일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남신면(南新面) 부흥동(富興洞)에서 태어났다. 1920년 중반경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 소속의 암살대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서간도(西間島)에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던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자치기관이었던 부민단(扶民團)을 비롯해 자신계(自新契)·교육회 등을 통합해 본격적인 독립운동 수행단체인 한족회(韓族會)를 성립시켰다. 한족회는 내부에 독립운동의 기반이 될 이주한인사회를 육성할 자치기구와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19년 11월 이 군정부를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해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할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로 전환시켰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독판(督辦)에 선임되어 지휘한 서로군정서는 정무·내무·법무·군무·참모부 등의 행정부서와 군사기구인 의용대를 설치하였다. 의용대의 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이었으며, 암살대는 의용대의 별동대였다. 신광재(辛光在)가 대장인 암살대의 대원은 10여 명이었는데, 대부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한 독립군 인재들이었다. 신흥무관학교 학감이었던 신광재가 용맹하고 민첩한 생도들을 선발해 암살대를 조직하였다. 이같이 최정예 독립군 특수부대인 암살대 2인자인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대는 군사 활동에 의해 모집된 군자금은 아주 일부만 대원들의 식비 또는 운영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교인 신흥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 인재 육성에 활용되도록 하였다. 1920년 1월 대원 이창덕(李昌德)과 정훈철(鄭勳哲) 두 사람을 한 조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로 진입시켰다. 이 유격대는 평북 자성군(慈城郡) 조아동(照牙洞)으로 가 그 곳에 거주하는 일본인 부호 나가미 간쿠로(永見寬九郞)의 집을 기습 공격해 상당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유격조는 같은 해 5월에도 자성군으로 진입해 삼흥면(三興面) 서해동(西海洞)에서 세금을 징수해 돌아가는 면서기를 공격해 거액의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또 1920년 8월 이창덕과 대원 이종식(李宗植)을 한 조로 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로 진입시켰다. 유격대는 같은 달 14일 평북 후창군 읍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약 4일간 읍내의 구조와 작전 대상을 면밀히 살펴 익힌 후, 8월 18일 초저녁 헌병보조원 한승무(韓承武)의 집을 엿보다가 그가 나타나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이 잘못되어 불발되었다. 1차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유격대는 2차 목표를 성공시키기 위해 후창군청의 서기인 김영석(金榮錫)을 포섭해 정보를 제공받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9월 1일 새벽 3시 후창군수 계응규(桂應奎)를 집 침실에서 저격해 처단하였다. 작전 수행 후 두 사람은 본부로 복귀하는 길에 강계군 종서면(從西面)까지 왔다. 그곳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김성진(金成辰)의 밀고로 이창덕이 강계경찰대에 붙잡혔다. 1920년 10월초 이창덕을 구출하기 위해 6명의 대원을 선발해 유격대를 편성하고 이를 지휘하였다. 민첩하게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유격대를 2개조로 나누었는데, 이때 송문하(宋文河)와 함께 제1조가 되고 이춘식(李春植)·전병기(田丙基) 등 나머지 4명으로 제2조를 만들었다. 강계군으로 진입한 유격대는 제1조는 종남면(從南面)을, 제2조는 종서면을 맡아 작전 대상지로 향하였다. 종서면으로 향한 제2조는 10월 3일 신성동(新城洞)으로 가 이창덕을 밀고했던 김성진을 처단하였다. 작전 수행 후 일제 경찰대가 수사망을 좁혀오자 잠시 은신해 있다가, 10월 하순 2개조를 합해 활동에 들어갔다. 10월 27일에는 종남면 원평동(院坪洞)으로 가 오후 9시경 그 곳에 거주하는 후창경찰서 소속의 한인 순사 김봉호(金鳳浩)를 저격해 처단하였다. 이틀 후인 29일에는 종서면으로 옮겨, 오전 0시 30분경 종포동(從浦洞)에 있는 전봉기(田鳳岐)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여인숙에 들어 가 국내에서 활동할 때 필요한 옷가지와 장비들을 조달해 나왔다. 다음 날 오전 8시경에는 종서면 황청동(黃淸洞)에 사는 전용진(田龍津)의 집에 들어 가 군자금을 모집하고, 오전 10시경에는 종서면의 곡물수매업자인 김진수(金鎭守)의 집으로 가 거금 2천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장 현금이 없다고 하자 수일 내로 다시 올 것이니 그 금액을 만들어 놓도록 명령하였고, 이 사실을 일제 경찰에 밀고하면 가족 모두를 처단하겠다는 경고를 남기고 나왔다. 그러나 종서면에서의 여러 활동이 일제의 경찰에 밀고되었을 것을 우려해 즉시 종남면으로 이동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31일 오후 11시경 종남면 한전동(閑田洞)에 거주하는 전 면장 김경룡(金慶龍)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5천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경룡은 당장 현금이 없다며 기다리면 만들어 오겠다고 속이고, 사람을 시켜 종남면주재소에 밀고하였다. 김경룡의 말을 믿고 기다리던 유격대는 다음 날인 11월 1일 오전 10시경 아키야마(秋山)가 이끄는 일제 순사대의 급습을 받았다. 이에 응전하였으나 기습적 공격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송문하·이경삼(李京三) 등 부하 대원과 함께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