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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震山

震山

1880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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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震山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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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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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한족회
  • · 서로군정서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정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14)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14)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이수영(李壽榮)·이윤명(李尹明)과 한자를 달리한 이진산(李振山·李進山)을 썼다. 한족회(韓族會),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남만주(南滿洲)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부민단(扶民團)을 중심으로 류허현·퉁화현(通化縣)·싱징현(興京縣)·환런현(桓仁縣)·지안현(輯安縣) 등의 항일운동가들과 함께 한족회를 조직하고 법무부장에 선임되었다. 그 해 9월 6일 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홍진(洪震)·조동우(趙東祐)·왕삼덕(王三德)·이유필(李裕弼)·윤기섭(尹琦燮)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한족회 류허현 삼원보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11일부터 4일간 류허현 삼원보 인근에 위치한 남산(藍山)에서 국민대회(國民大會)가 개최되었다. 하이룽현(海龍縣)·류허현·퉁화현·린장현(臨江縣)·지안현·환런현·관뎬현(寬甸縣)·싱징현에서 항일운동가 약 100명이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①한반도 내에서 혈전(血戰)할 것, ②군비(軍費)는 국민대회에서 부담하고 임시정부에 원조를 구할 것, ③작전계획은 국민대회 간부가 수립할 것, ④무기는 국민대회에서 준비하고 주로 현재의 권총을 사용할 것, ⑤독립선전기관을 확충하고 내외(內外)의 선전에 한층 노력할 것, ⑥이상의 계획을 순조롭게 수행하기 위해 대표자를 상하이(上海)에 보내 협의할 것. 이 결정에 따라 목사 최경주(崔聖柱), 류허현 고산자(孤山子) 신흥학교(新興學校) 교두(敎頭) 윤기섭과 함께 선전책임자에 선임되었다. 1920년 2월 23일부터 열린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 4명과 함께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①5월 내에 군사회의를 소집할 것, ②군사기관을 만주(滿洲)로 이동할 것, ③올해 내에 만주에서 보병 10~20개 연대 2~4만 명을 훈련할 것, ④올해 내에 사관(士官)과 준사관(准士官) 1천 명을 양성할 것, ⑤올해 내에 전투를 개시하되 보병 10개 연대를 출동시킬 것 등이었다. 1920년 3월 16일 임시의정원 의원 이유필·이한근(李漢根)·윤기섭·김홍서(金弘敍)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게 향후 독립운동방략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16개 항의 질문을 제출하였다. 3월 19일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2개월 안으로 정부로 불러 정무를 처리하자는 안건을 제출하였고, 3월 22일에 안건 통과시키고 그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냈다. 1920년 4월 17일 윤기섭·왕삼덕과 함께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군사회의와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에 관해 협의하였다. 5월 22일 안창호·왕삼덕과 함께 간도에서 독립운동 전개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같은 해 11월 한족회 사판사장(査判司長)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함께 태평양회의에 보낼 「한국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그해 5월 6일 어무현(額穆縣)에서 여준(呂準)·이탁(李沰)·김동삼(金東三)·곽문(郭文)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개조(改造)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회의 결의서를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하여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5월 하순 여운형(呂運亨)·안창호 등과 상하이 프랑스조계 서병호(徐丙浩)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하여 각 독립운동단체에 격문을 보내 114명의 대표자를 소집하고 상하이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 7월 12일 임시정부에 다음 3항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였다. ①이승만과 그 공모자 전부를 추방하고 그들을 성토할 것, ②정부는 이전에 33인이 서울에서 조직한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여 건설할 것, ③이전에 고창한 통일책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회답할 것. 1922년 2월 18일 제1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7월 12일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내에서 여운형·안창호 등 6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시사책진회는 국민대표대회 소집 문제와 독립운동진영 내부의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상하이로 이동하였다. 1월 16일 안창호·송병조(宋秉祚)·배천택(裴天澤)·이상호(李相㵆)와 함께 자바이칼에서 국민대표회의에 파견된 태용서(太龍瑞)·엄륜(嚴崙)의 대표 자격을 심사하기 위한 특별심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월 23일 신숙(申肅)·김철(金徹)·원세훈(元世勳)·유선장(柳善長)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의정기초위원(議程起草委員)에 선임되어 의정 초안을 작성하였다.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 정식 회의에 김형식(金衡植)과 함께 한족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3년 2월 6일 국민대표회의 회의에서 신숙·안창호·윤해(尹海)·김철(金澈)·이민창(李民昌)·유시언(柳時彦)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2월 8일 국민대표회 회의에서 김갑(金甲)·김상덕(金尙德)과 함께 선언문수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선언문수정위원회에서 수정한 선언문을 2월 14일 국민대표회의 회의에서 낭독하였다. 2월 28일 김동삼·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임시정부 운영에 관해 협의하여 김구(金九)·홍진의 입각,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안 제출과 퇴직 등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1923년 3월 13일 여운형·김상덕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안(改造案)에 찬성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 해 4월 20일 국민대표회의 대표들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서로군정서와 한족회로부터 소환 통고서를 받고 5월 15일 김동삼·배천택·김형식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만주 대표 사면(辭免)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6월 3일 개조파(改造派) 대표들과 함께 창조파(創造派)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일 이유필·오영선(吳永善)·윤자영(尹滋英)·손정도(孫貞道)·김이대(金履大)·백남준(白南俊) 등과 함께 헌법개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8월 중한국민호조사총사(中韓國民互助社總社) 창립 당시부터 사원(社員)으로 활동하였다. 9월 화뎬현(樺甸縣)에서 이상룡(李相龍)·방진성(方眞成)·김응섭(金應燮)·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韶)·김동삼 등과 회의를 열고 지린(吉林)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를 진행하였다. 10월 15일부터 11월 5일까지 상하이 프랑스조계 교민단사무소에서 교민단장 이유필, 의원 윤기섭·김승학(金承學)·여운형·김두봉(金枓奉) 등과 함께 교민단과 인성학교(仁成學校) 운영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였다. 1924년 7월 지린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 발기회가 개최되어 이광민(李光民)과 함께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는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 이욱(李旭),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 대표 김호(金虎)·윤덕보(尹德甫),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대표 이장녕·윤각(尹覺),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대표 김동삼·이종건(李鍾乾), 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대표 최명수(崔明洙), 학우단(學友團) 대표 승진(承震)이 참석하였고, 이들과 함께 발기문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발기문 10장을 인쇄하여 만주 각지 독립운동단체에 발송하였다. 1924년 10월 18일 지린에서 개최된 전만통일회의주비회 본회의에 참석하였다. 각 단체 대표들과 협의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중앙행정위원과 자치분과위원, 무기인계위원에 선임되었다. 11월 24일 고활신(高豁信) 등 20명과 함께 전만통일회의 선언서, 선서문과 공약(公約)을 발표하였다. 12월 31일 이탁·김원식(金元植)·양규열(梁圭烈)과 함께 서로군정서가 정의부로 통합된다는 내용의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 3월 7일 정의부 법무위원장, 외무위원장 대리에 선임되었다. 또한 중앙행정위원회에 참석하여 정의부 운영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부령(府令) 제1호부터 제13호까지 의결하였다. 3월 30일 중앙행정위원들과 함께 부령 제15호로 교육령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4월 9일 중앙행정위원들과 함께 정의부 직제와 소득세 징수 규정 등 9개 안건을 의결한 포고령 제5호를 발표하였다. 7월 31일 중앙행정위원회 비상회의에 참석하여 사판소구성법(査判所構成法), 개정 직제 승인 등의 내용을 포함한 부령 제261호부터 제269호까지 의결하여 공포하였다. 1926년 1월 8일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임시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앙의회(中央議會) 해산을 의결하고 1월 11일 중앙행정위원회 포고 제13호로 이를 공포하였다. 12월 7일 지린성 반석(磐石)에서 권진화(權進華)·이준(李俊)·김형식 등과 함께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者後援會) 발기문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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