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曾魯
曾1898. 1. 15 ~ 1962. 8.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길림군정서
- · 고려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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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98년 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河濱面) 현내리(縣內里)에서 태어났다.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당시 주소는 경성부 안국동(安國洞)이다. 이명은 이일심(李一心)·이강동(李江洞)을 썼다. 대구의 달성중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였고, 1914년에는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전수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다가 국내로 돌아왔다. 종교는 천도교이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많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만주에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독판(督辦)으로 활동하던 유동열(柳東說)을 만나 독립운동의 취지를 듣고 그를 도왔다. 같은 해 7월 이채우(李採雨)는 만주에서 군정사 소속 김영순(金永淳)을 만나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유동열 명의의 군령(軍令)과 신임장 인쇄를 명받았다. 서울로 돌아온 이채우·김철(金喆) 등과 같이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 독판취지서」 30여 장을 인쇄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경남 지방 부호들을 탐문하려 하였다. 또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의 부하였던 박행원(朴幸源)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중국지폐 위조를 논의하였다. 경성부 종로 6정목(丁目)에 있는 안우선(安祐璿)의 집에 인쇄기계를 설치하고, 제작 후 위조지폐를 상하이로 밀송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적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같은 해 9월에 붙잡혔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경남 지방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경성부(京城府) 가회동(嘉會洞, 현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하숙집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유세관(柳世觀)·권익주(權益洙)·이시우(李時雨) 등과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며 독립에 대하여 어떠한 운동을 하면 좋을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그들은 ‘합방기념일’을 국치기념일로 정하고, 일반인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독립정신에 관한 문서를 작성, 인쇄, 배포하려 하였다. 이러한 행적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1921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사문서 위조행사 위반, 강도예비죄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다시 풀려난 후 만주의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여 같은 천도교인 최동희(崔東曦) 등과 같이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만주 지린성(吉林省) 신문문(新間門) 밖 길원정미소(吉源精米所)에서, 천도교, 정의부(正義府) 및 일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돌아온 인원들이 모여 고려혁명당 결당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당내의 주요 간부로 하얼빈(哈爾賓)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듬해 초 정의부 대원 이완주(李完柱)·김일호(金一號) 등 5명과 같이 하얼빈 해룡회사(海龍公司)에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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