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仲執
仲執1880. 5. 28 ~ 1936. 1.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간민회
- · 고려혁명군
- · 한족공산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9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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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6) 1880년 5월 28일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현 원산)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이중집(李仲集·李重集·李中執)과 이중읍(李仲揖)을 사용하였다. 가족은 부인 남씨(南氏), 2남 1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 책 읽기를 좋아하여 어려운 가정형편임에도 부모님이 서울로 보내 중등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기독교 전도사, 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04년부터 1911년까지 원산(元山)에서 민족운동단체 ‘용감’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소영자(小營子)에서 이동휘(李東輝) 등이 조직한 광성학교 교원이 되었다. 중국권학소(中國勸學所) 학무원(學務員)으로도 활동하였다. 1913년 1월 13일 이동춘(李同春)·정재면(鄭載冕)·구춘선(具春先) 등과 함께 간민회(墾民會) 발기인으로서 간민회 조직 총회 소집 통지서를 발표하였다. 간민회는 중국 지방정부의 인가 하에 조직된 단체였다. 간민회 평의원(評議員)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13일 간도 국자가(局子街)에서 동지들과 함께 청년친목회를 조직하고 상의원에 선임되었다. 1914년 2월 4일 간민회 연길분회(延吉分會) 회의에서 의사원(議事員)에 선임되었다. 4월 15일 국자가 전(前) 간민회관에서 청년친목회와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가 통합하여 동제회(同濟會)가 조직되었다. 이때 동제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18년 11월 미국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들은 한반도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간도에 전해지자 항일운동가들이 이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이성근(李聖根)·유찬희(柳纘凞) 등과 함께 국자가 방면 모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5일 간도에서도 파리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2월 8일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장 김약연(金躍淵), 용정촌(龍井村) 기독교 전도사 정재면과 함께 노령(露領)으로 가서 파리에 대표를 파견하는 사항을 논의하기 위한 대표로 선정되었다. 2월 13일 훈춘(琿春)으로 이동하여 훈춘특파원과 합류한 후 노령으로 출발하였다.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성립될 당시 김립(金立)과 함께 주계(主計)에 선임되었고, 선전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20일 김약연·정재면·김하구(金河球)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니콜스크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항일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기능을 하는 중앙기관을 창설하여 일제에 “한국독립을 승인하라”는 통첩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적절한 회답이 없으면 한반도와 중국, 노령의 한인(韓人) 명의로 일제에 “영구(永久)한 혈전(血戰)”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7월 연해주 추풍(秋豊, 현 수이푼)에서 동지 30여 명과 함께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을 조직하였다.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을 편성하고 지방 대표도 선정하였다. 8월 5일 한족공산당 13개 지방 대표 26명이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에서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군정의회(軍政議會)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21년 2월 초 연해주고려혁명군(沿海州高麗革命軍)이 창설되었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집행위원회 내에는 군사부, 피복부, 향무부, 재정부, 행정부가 설치되었고, 행정부장을 담당하였다. 1922년 초 「연해주한족공산당연합총회주의선전서(沿海州韓族共産黨聯合總會主義宣傳書)」를 작성하여 간도와 훈춘에 배포하였다. 그해 2월 노령 수분하(綏芬河, 현 중국 헤이룽장성 쑤이펀허)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규합하여 한족공산당 지부를 설치하였다. 이후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간부 약 50명을 간도와 한반도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개설하기로 하고 4월 1일부터 대원과 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4월 하순 일본군 제11사단이 고려혁명군 ‘토벌’에 나서자 무장력을 보존하기 위해 대원 460명을 이끌고 의용단(義勇團), 혈성단(血誠團)과 함께 둥닝현(東寧縣) 노흑산(老黑山)으로 이동하였다. 5월 5일 약 100명을 이끌고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로 이동하여 삼차구(三岔口) 방면의 동지와 연락하며 연해주로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1922년 6월 8일 폴타프카촌에서, 6월 16일 시베찬과 타피고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6월 19일 러시아 세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7월에는 나자구 북방 노모저구(老母猪溝)에서 활동하였다. 8월 26일 연해주, 둥닝현, 훈춘현 방면에서 독립군 대원을 모집하였다. 8월 말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독립군을 훈련하였으며 각지에 은닉한 무기를 수집하였다. 1922년 9월 추풍 육성(六城, 현 푸칠로브카)에서 약 2,000호의 한인이 모여 “일본군 철퇴 축하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회장을 맡아 축하회를 주관하였다. 축하회에서는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 실행하기로 하였다. 같은 시기 고려혁명군 연해주총지부 총재에 선임되었다. 이때 부대를 재편성하여 참모부, 서무부, 재무부, 선전부, 사법부, 외교부, 검사부(檢査部), 군량부(軍糧部) 8개 부서를 두고 동서남북 4개 처 사령부를 두었다. 소속 부대는 24개, 대원은 총 2,000여 명이었다. 1922년 9월 14일 추풍 솔밭관[송전관(松田關)]에서 치타(Chita)로부터 파견된 군사위원 오하묵(吳夏黙)·김하석(金夏錫)과 혈성단, 군비단(軍備團), 의용단 대표와 함께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①각 단체는 고려혁명군에 통합하여 공산주의 아래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 ②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0월 하순부터 노령 소성(蘇城, 현 니콜라예프카)에 사관하사양성소(士官下士養成所)를 설립하고 간도에서 대원을 모집하여 입소시키며, 훈련기간은 6개월로 하고 1기에 700명씩을 양성하여 무장부대를 조직할 것 등이다. 1922년 9월 20일 남준(南俊)을 귀순사무소장(歸順事務所長)에 임명하고 장총 1정과 탄약 500발로 무장시켜 연해주지역 친일한인에 대한 귀순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922년 11월 초 솔밭관에서 김규식(金圭植)과 함께 소대장 이상이 참석하는 고려혁명군 간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오성륜(吳成崙)의 주장에 따라 중대장 박인선(朴仁善), 모연소대장(募捐小隊長) 이문순(李文順), 모연대원 박창민(朴昌敏)을 한반도로 침투시켜 종로경찰서, 평양부청(平壤府廳), 서울 용산(龍山)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관사를 파괴하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1922년 11월 16~17일 “국교상, 국내 치안 유지상 지장이 있다”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적군(赤軍)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러시아 내전 시기 치타정부와 원동부(遠東部)에서는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기 전에 한인 독립군부대가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여 “공적이 있으면 후일 연해주 내에서 한국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특별자치구역을 주고 한국 독립운동을 원조한다”라고 내약(內約)한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혁명군 약 200명은 적군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11월 3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이후 적군은 고려혁명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다. 무장해제를 피하여 대원 약 300명을 이끌고 둥닝현 노흑산을 거쳐 왕칭현 나자구로 이동하였다. 1922년 12월 치타정부와 원동부에서는 한인 독립군부대에 중러 접경지대 부근 토지를 주어 수전을 경작하도록 하여 둔전병제(屯田兵制)를 시행하고 점차 그들을 평민화 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다시 노령으로 이동하여 문창범(文昌範)과 향후 활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12월 중순 고려혁명군 간부 십수 명과 함께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이동하여 러시아 적군 대표와 만나 해제 무기 반환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혁명위원회, 적군 총사령부와 교섭하여 1922년 12월 하순부터 1923년 1월 5일까지 노령 수청(水淸, 현 니콜라예프카)에 모여 자위군(自衛軍)으로서 재무장하였다. 부대를 개편하고 최호림(崔虎林)과 함께 군정위원에 선임되어 1923년 3월까지 부대를 정비하였다. 1922년 말 솔밭관과 하바로프스크 이남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청천(池靑天)·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이동휘 등과 함께 노농신조선독립국(勞農新朝鮮獨立國)을 선포하였다. 1923년 1월 김좌진·김경천(金敬天) 등과 함께 소련정부가 전개한 중동철도(中東鐵道) 회수운동에 동참하여 활동하였다. 3월 말~4월 초 시기 고려노농민회(高麗勞農民會) 회의에서 위원에 선임되었다. 4월 노령 이만(Iman, 현 달네레첸스크)에서 고려혁명군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5월 23일 동지들과 함께 솔밭관 동방 약 1리 당어자동(唐漁子洞) 곡지(谷地)에 은닉한 소총 300여 정, 기관총 3정, 폭탄 수백 개, 탄환 15,000여 발을 확보하여 둥닝현 오사구(烏蛇溝) 동방 석두하(石頭河)로 운반하였다. 1924년 봄 추풍 소성에서 고려혁명군 정무총위원장(政務總委員長)에 선임되었다. 4월 이범윤(李範允)이 지휘하는 독립군단에 참가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8월 대한신정부(大韓新政府) 조직을 준비하여 11월 임시중앙비서장에 선임되었다. 9월 추풍에서 활동 중 소련 적위군에 무장해제를 당하여 11월 부하 85명을 이끌고 둥닝현 삼차구(三岔口)를 거쳐 왕칭현 나자구로 이동하여 군량(軍糧)을 모집하였다. 1925년 3월 2일 지린성(吉林省) 닝안현(寧安縣) 김현(金鉉)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회의를 열고 만주 독립군과 고려혁명군이 서로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협의하였다. ①종래 연해주 이만에 있는 고려사관학교(高麗士官學校) 분교로 지린성 호림현(虎林縣) 평달촌(坪達村)에 제2사관학교를 설립할 것, ②위 학교 경비는 지방유력자로부터 모연할 것, ③제2사관학교는 1925년 7월에 개교할 것, ④만주 독립군과 고려혁명군은 앞으로 15년간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 이 회의에서 제2사관학교 학무위원에 선임되었다. 항일무장투쟁 이후에는 연해주에서 경제건설에 참여하였다. 공생조합을 조직하였고 1929년에는 웅천조합 회장으로, 1930년에는 원동독립군단조합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러시아 10월 혁명 15주년 기념 당시 연해주 빨치산 지도자 9인에 선정되었다. 1935년 말 스탈린(Joseph Stalin)의 숙반운동(肅反運動) 당시 숙청되어 1936년 1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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