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元
鍾元미상 ~ ?
관련 단체
- · 27결사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와 출신지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만주로 이주한 이후 27결사대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27결사대는 1919년 1월 경술국치 직후 서간도로 망명한 이탁(李鐸)이 한인 청년 26명을 모아 조직한 단체이다. 결사대의 명칭은 대장 이탁까지 포함해 27명의 구성원이었기에 27결사대로 이름 지어졌다. 이때 27결사대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27결사대는 첫 활동 목표를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서 국장 행렬을 따르는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27명의 대원들은 4개조로 나뉘어 3개조는 2월 24일부터 시차를 두고 목적지인 서울로 향하기로 하고, 1개조는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에서 무기를 받아 늦어도 3월 2일까지는 서울에 도착하기로 하였다. 서울로 향한 3개의 행동조는 이틀만인 2월 26일까지 모두 도착하였다. 그리고 국장 행렬이 지나는 길을 사전 답사하여 매국노들이 위치할 만한 자리를 측정해 가며 무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거사일인 3월 3일이 되었지만 무기가 오지 않았다. 무기는 거사일을 무려 12일이나 지난 3월 15일에 도착하였다. 대원들은 논의를 거쳐 계속 서울에 머무르며 다음 기회를 포착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날이 올 때까지 다른 애국적인 일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대원들 중 무기를 잘 다루는 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 등 5명의 대원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애국적 일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애국적인 일을 수행하는 조의 일원이 되어 독립문에 새겨진 색이 바래 희미해진 태극기의 색을 선명하게 다시 칠하였다. 독립문을 독립국가의 상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친일 매국노들의 행위를 폭로하고 그들을 기필코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성토문·격문 등을 종각이나 독립문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부착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결사대의 활동이 일제의 검거망에 포착되어, 5월 5일 안경식(安景植)·손창준·이우영(李宇榮)·박진태(朴鎭台)·이기원(李基原)·박기한(朴基寒) 등 동지들이 일제 경찰대에 붙잡혔다. 다행히 일제 경찰들의 손을 벗어날 수 있어서 사선을 뚫고 서간도의 본부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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