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鄭守基1896. 4. 24 ~ 1936. 2.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제2차 유림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6년 4월 24일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서면(西面) 신평리(新坪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내익(乃益), 호는 일천(一川)이다.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儒林)의 원로인 김창숙(金昌淑)과 연락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다. 1922년 (음)7~8월 무렵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손후익(孫厚翼)의 소개로 김창숙을 만났다. 이후 수개월 동안 김창숙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 계획을 세웠다. 1923년 1월 김창숙의 명을 받고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손후익과 협의하여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나섰다. 아울러 김창숙의 사촌인 김창백(金昌百)과 김창탁(金昌鐸) 등도 자금 모금에 동참하였다. 주로 김창백과 함께 주로 봉화(奉化)·안동(安東)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손후익은 달성(達城)의 최해윤(崔海潤)으로부터 100원의 자금을 확보하였다. 1923년 5월 모집한 자금을 김창탁을 통해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보냈다. 그 뒤에도 김창숙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군자금을 보냈다. 1925년 (음)8월 무렵 국내로 들어온 김창숙을 만나기 위해 상경하여 8월 19일 김창숙과 만났다. 이 때 김창숙은 내몽골지대의 황무지를 빌려 개간하여 그 수익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이를 근거로 독립을 달성하려고 한다는 계획을 알렸다. 이에 따라 김화식(金華植)·손후익·이재락(李在洛)·이동흠(李棟欽)·김동진(金東鎭) 등에게 협력을 구하고 임무를 분담하여 독립자금을 모집하기로 약속하였다. 8월 하순 서울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 내에서 여러 인사들과 자금 모집의 방법, 분담을 논의하고 실행에 착수하였다. 1925년 (음)9월 김창숙과 함께 충남 대전(大田) 유성온천에서 이재락(李在洛)을 만나 자금 200원을 제공받았다. 김창숙과 헤어진 후 그해 (음)10월 초순 경북 봉화군 내성면(乃城面) 해저리(海底里)의 김홍기(金鴻氣)와 만나 김홍기를 통해 봉화의 부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의 제공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우선 김래식과 강필(姜泌)에게 자금 제공을 의뢰하였다. 그리고 김창숙의 사촌동생인 김창백(金昌百)의 집에서 김래식을 만나 자금 제공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기대만큼 자금이 모이지 않자 김창숙은 1925년 10월 하순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모험단과 모집단이라는 두 개의 부서로 편성되었는데, 모집단은 담당지역 1개소에 1천 원 이상을 요구하고 불응할 때는 모험단의 존재를 알려 위협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김화식·송영호와 함께 모험단의 구성원이 되어 권총으로 무장하고서 친일부호 처단과 자금모집 여건 조성에 나섰다. 안동군 이동흠(李棟欽)·이종흠(李棕欽) 형제를 방문하여 김창숙의 계획을 알렸다. 이에 이종흠은 1925년 (음)12월 영양군(英陽郡)의 외숙부 이현병(李鉉秉)에게 자금을 의뢰한 뒤, 1926년 (음)1월 찾아가서 2만 원을 요구하였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어 청도의 부호인 윤병권(尹炳權)에게 2만원을 요구하였으나 200원을 모금하는 데 그쳤다. 1926년 (음)10월 다시 상경하여 김창숙과 김화식을 만나서 경남 양산(梁山)·진주(晉州) 등의 부호에게도 자금을 모집하고자 계획하였다. 계획을 실천하고자 먼저 출발하여 대구(大丘)에서 투숙하고 3일 후 김화식을 만나 김창숙의 오랜 친구 장석영(張錫英)을 방문하였다. 장석영은 성주(星州)의 이기원(李基元)에게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소개장을 적어 이들에게 주었다. 소개장을 받은 후 김후식과 함께 이기원을 찾아가 자금 요청을 의뢰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이후 김창숙은 1925년 8월부터 1926년 3월까지 모금된 3,500원의 자금을 갖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자금은 1926년 12월 27일 나석주(羅錫疇) 의거에 사용되었다. 김창숙이 돌아간 뒤에도 국내에서는 자금 모집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드러나 유림 인사 6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12명이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 일로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심을 거쳐 1928년 1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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