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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炫郁

趙炫郁

1854. 1. 2 ~ 19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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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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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구(大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대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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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청송군 현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54년 1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성당동(聖堂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호는 목산(牧山)이다. 1615년 경북 청송군(靑松郡) 안덕(安德)에서 대구부 원대동(院垈洞)에 입향한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의 주손(主孫)이다. 아버지는 조경화(趙敬和)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조명화(趙命和)에게 입양되었다. 선대의 고향인 청송군 현서면(縣西面) 수락리(水洛里)에 은거하며, 일제의 국권 강탈은 한국 국민의 의사가 아니라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분개하며 국권 회복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3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화목장터에서 전개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소식을 접하고 이때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먼저 현서면 무계동(武溪洞)의 사돈 신태휴(申泰烋)와 함께 현서면 복동(福洞, 현 안덕면)의 조병국(趙柄國)에게 격문을 보내 궐기를 촉구하는 등 만세시위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3월 26일 아침 신태휴·조병국 등과 함께 마을 사람 50여 명을 이끌고 화목장터로 이동하였다. 장터로 가는 도중에도 사람들이 합류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늘어났고, 참여자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현서면 화목장터에 도착했을 때, 마침 현서면사무소에는 각 마을의 구장(區長)들과 면내 유지(有志)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회의는 일제가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놓고 달래고 협박하기 위해 개최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회의에 참여한 구장과 유지들에게 만세시위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며 종용해 일부가 시위 대열에 가담하였다. 이처럼 일부 구장과 유지들의 호응까지 얻게 된 시위대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화목장터로 몰려갔다. 오후 1시경 주변의 사람들까지 호응하며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현서면 화목주재소(和睦駐在所)의 일본인 순사(巡査)와 한국인 순사보(巡査補) 2명은 면장과 함께 시위대를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때 신태휴와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2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집으로 돌아갔지만, 암담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였다. 결국 ‘정의(正義)없는 곳에서 살아있기보다 차라리 정의를 위하여 죽기만 같지 못하다’는 유서와 함께 벽에 “멱시부연(覓尸釜淵 : 시체는 부연에서 찾으라)”이라고 써놓고, 현서면 수락리(水洛里)에 있는 부연(釜淵)에 투신해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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