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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겸

田炳謙

1883. 5. 27 ~ 1958.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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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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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蔚珍)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울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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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울진군 원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83년 5월 27일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북면(北面) 고목리(古木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자는 선(善)이고, 호는 운석(雲石)이다. 할아버지는 학산(鶴山) 전윤(田潤)이고, 아버지는 전인상(田絪相)이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환에 정성을 다하였고, 어머니의 중풍에 8년간을 손발이 되어 모시니 세칭 효자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뒤 6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가와 민족의 쇠망(衰亡)을 개탄하며 구습(舊習)을 탈피하고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기독교도로 전향하였다. 이후 향리에 지장감리교회(智藏監理敎會)를 설립하여 전도사로 시무하며 교우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울진군 원남면(遠南面) 만세시위에서 원남면 매화리(梅花里)의 윤병관(尹炳寬)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윤병관은 근남면(近南面) 출신 장식(張植)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보고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서울 중앙감리교회 전도사였던 외조부로부터 비밀서신을 받았는데, 그것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과 교회가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지였다.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장식이 울진 헌병분대에게 예비 검속된 뒤, 윤병관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윤병관은 매화리의 지방 유림을, 본인은 고목리 지장감리교회의 전도사였으므로 신교육을 받은 만흥학교(晩興學校) 졸업생과 기독교도로 이루어진 농민을 결속하여, 이들을 주축으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매화장터 장날인 4월 11일로 정하였다. 한편, 거사 전날인 4월 10일 아침 8시경 마을 뒷산에서 먼저 만세 함성이 울렸다. 매화리 윤상흥(尹相興)의 주도로 전학복(田學復)을 비롯한 6명이 남수산(嵐峀山) 중턱에 올라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함께 불렀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 경찰의 경계는 강화되었지만, 4월 11일 매화장터 만세시위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4월 11일 오후 3시 매화장터에 모인 주도 인물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최효대(崔孝大)는 원남면사무소 정문 앞에 현수막을 친 후 큰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윤병관·남재량(南載亮)·윤정규(尹定奎)·최중모(崔重模) 등과 함께 ‘대한독립기’라고 쓴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함께 부르니, 장꾼들도 가세하여 온 장터가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때 감리교 인사들로부터 만세운동을 자제해 달라는 주의와 당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일제 경찰의 해산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위 군중은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일제 헌병은 주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여 윤병관·최효대·남재량·윤정규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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