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민
張基民1897. 3. 17 ~ 1921. 2.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연기군 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7년 3월 17일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 송룡리(松龍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장치복(張致福)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연기군 동면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연기군의 만세운동은 3월 13일 전의면에서 시작하였으며, 3월 23일에는 조치원 부근 산 위에서 횃불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동면(東面)에서는 3월 26일 응암리 주민들이 청주 강내면 사곡리 주민들과 연합 횃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3월 27일에도 예양리·노송리·송룡리 3개 마을 6개소에서 횃불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예양리 구장인 장재기(張在基)는 강내 면민과 연락하여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조치원 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만세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도 인사 8명을 체포하는 탄압을 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연기 군수 이민녕(李敏寧)은 각 면사무소을 순회하면서 면민들을 모아 놓고 만세운동을 제지하기 위한 회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민녕의 순회는 연기군 일대에서 연일 계속되는 만세운동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3월 28일 군수 이민녕이 동면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면민들을 면사무소로 집합하도록 하였다. 이에 장홍진(張弘鎭)을 비롯해서 송룡리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갔다. 군수가 “시국(時局)에 관한 불온(不穩)한 언동을 하지 말라”고 독립운동을 제지하는 친일적 연설을 하자 “군수는 우리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권유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를 제지하려고 하니 의외 천만으로 이런 강연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장내가 갑자기 소란해지자 동면 면장은 이들을 힐책(詰責)하며 사태 수습에 적극 나서 시비는 일단락되고 면민들을 해산시켜 마을로 돌아왔다. 귀가 이후 장홍진과 독립 만세 운동을 결행을 결심하고 면민들을 모으기 위하여 마을 산 위에 올라 횃불을 올렸다. 이에 호응하여 송룡리 마을 주민 10여 명이 산 위로 올라왔다. 이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횃불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 조치원헌병분견소에 붙잡혀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지 않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악형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21년 2월 24일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