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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熙龍

熙龍

1872. 6. 17 ~ 1948.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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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熙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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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2년 6월 1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 납리(納里)에서 아버지 백성(白城) 이씨 공녀(李公汝)와 어머니 경주 이씨 경원(李慶元)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元谷面) 외가천리(外加川理)이며, 2살 때 부친을 여의고 호주 상속을 받았다. 신문 조서에는 “10세 무렵까지 천자문을 배웠을 뿐”이라고 밝혔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주막을 운영하였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과 함께 4월 1일 밤에 원곡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날 저녁 면사무소에 앞에 집결한 1,000여 명의 원곡면 주민들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갈수록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격화되었고, 주도자들과 함께 시위대에게 일제의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향하자고 외쳤다. 이에 호응한 시위대와 함께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한편, 이날 밤 양성면 주민들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는데, 해산 즈음에 행진해오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목격하였다. 이에 양성면과 원곡면의 시위대는 연합하여 약 2,000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여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공격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양성우편소, 양성면 면사무소,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던 일본인의 상점과 집으로 향하여 파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같은 만세시위 관련자를 조사·색출하기 위해 4월 3일 일제는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져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받았고,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만세시위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은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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