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6. 9. 20 ~ 1949. 2.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화목장터(3
- · 26~27)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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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6년 9월 20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서면(縣西面) 사촌동(沙村洞)에서 태어났다. 34세가 되던 1919년 3월 26일과 27일 양일간 청송군 현서면 화목(和睦)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화목 장터 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하고 실행한 인물은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이었다. 조현욱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알고 이를 기회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고 무계동(武溪洞)에 사는 사돈 신태휴(申泰烋)와 복동(福洞)에 사는 조병국(趙柄國)에게 격문을 보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조현욱의 격문을 읽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3월 26일 아침 조현욱·신태휴·조병국 세 사람은 뜻을 함께 하는 마을 사람 50여 명과 시위대를 결성하여 화목 장터로 향하였다. 조현욱이 주도가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만세운동에 주저 없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시위대가 화목 장터로 향하는 동안 동참하는 군중의 수는 점점 늘어났으며, 현서면의 구장과 유지들도 조현욱의 설득으로 참여하면서 군중의 사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오후 1시 경 시위대가 장터에 도착했을 때에 참여한 군중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이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 군중을 총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현욱과 신태휴도 체포되면서 이 날의 만세운동은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붙잡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태극기를 만들며 다음날의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조병국 또한 다시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밤을 새워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3월 27일 아침, 말을 탄 조병국의 지휘아래 마을 사람 1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화목 장터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마을을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군중이 참가하였고, 군중에게 자신이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장터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5~6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손에는 나눠준 태극기를 흔들며 평화적으로 시위하였다. 이때 군중 앞에 청송경찰서 소속 한국인 경부(警部)와 순사들이 길을 가로막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시위대는 해산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행진하였으며 군중의 수는 점점 더 늘어갔다. 시위대가 일제 경찰과 대치 상황이 발생하자 조병국은 한국인 경부를 크게 꾸짖었고, 시위가 다소 격렬하게 전개되자 경부는 칼을 뽑고 공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공포 소리에 군중이 놀란 틈을 탄 일제 경찰이 조병국을 말에서 떨어뜨려 붙잡히자 군중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다. 군중은 조병국을 구하기 위하여 경찰들을 포위하였고, 이때 순사 한 명이 군중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총소리에 군중은 흩어지고 4명의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사건이 이감되어, 5월 2일 2심에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시 불복하고 상고하였지만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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